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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은 시인 / 나는 오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2.

오은 시인 / 나는 오늘

 

 

나는 오늘 피곤해

나는 오늘 일어나

마음을 삐뚤게 먹었지

습관처럼 아침을 먹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오늘은 어디에 가 볼까

피곤해도 학교는 가야겠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

 

시침처럼 느리게 움직일래

초침처럼 경쾌하게 달려갈래

순간을 흘려보내는 마음

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흔적을 지우거나 치우며

사연을 만들거나 쌓으며

나는 자꾸 작아져

몸에 마음이 붙어, 마음에 살이 붙어

나는 오늘 불행해

 

그럼에도

 

나는 오늘 살아가

 

나는 오늘 피어나

나는 오늘 나야

 

내내 나일 거야

 

 


 

 

오은 시인 / 아무개 알아?

 

 

알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뚱뚱한 애?

시 쓴다는 애?

철학책만 읽는 애?

긴장하면 말 더듬는 애?

이상한 옷 입고 다니는 애?

또 다른 아무개와 사귀었다는 애?

또 다른 아무개한테 결국 차였다는 애?

 

아무개에 대한 말들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아무개가 아무 개라도 되는 듯이

개잡듯 물어뜯고 헐뜯었다

뜯긴 자리는 비열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웃는 얼굴에 서로 신나게 침 튀기는 동안,

아무리가 아무렴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빛바랜 동전들이 쏟아졌다

다보탑이 무너졌다

벼 이삭이 흩어졌다

이순신 장군이 엎드렸다

학이 곤두질했다

 

알고 싶은 사람이 모르고 싶어졌다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 같았다

 

동전의 뒷면은 보지 않아도 알지

 

아무개가 되기 싫어

얼굴을 가리고 정치 없이 걸어 다녔다

 

 


 

 

오은 시인 / 읽다만 책

 

 

핑계는 언제든지 댈 수 있다

책 속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워요

재미가 없어요

취향에 안 맞아요

유행이 지났어요

제목과 달랐어요

시기를 놓쳐버렸어요

결말을 알아버렸어요

영화로도 나왔더라고요

최근에 야근이 많았어요

좀 한가해지니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았어요

급하게 읽을 다른 책이 생겼어요

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어요

 

끄집어내고 갖다 붙일 사연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책 속의 주인공은 할 말이 있는데

우리는 입을 다물린다

책 밖에서는 우리가 주인공

할 말이 많아서

대사는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책 밖의 세계에서는 실시간으로 페이지가 넘어가는데

책 속의 주인공은 머뭇거리고 있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혹은 영영

 

다문 입으로

다 읽은 책은 말이 없다

닫힌 입으로

읽다 만 책은 말이 없다

 

사다만 책은 없다

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

읽다만 책만 있다

 

다 읽은 책에는 먼지가 쌓인다

읽다 만 책에도 먼지가 쌓인다

하루하루의 더께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당분간 책갈피는 움직이지 않기로 한다

반쯤 열리거나 반쯤 닫힌 입으로

산 입에 거미줄을 치는 표정으로

제자리를 집요하게 더듬는 걸음으로

 

무수히 접한 처음들

무수히 남은 마지막들

 

마음이 한번 마음먹고 얼면 봄이 되도 녹지 않는다

 

 


 

오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시 출생.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 2013)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 2016) 『왼손은 마음이 아파』(현대문학, 2018), 『나는 이름이 있었다』(아침달, 2018)가 있음. 2019년 제27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작란(作亂)’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