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잠 시인 / 묵묵
당신, 내게 사랑하냐고 묻지만 그리 간단히 말하긴 어려워
당신, 가만히 대답 기다리지만 그리 쉬운 말로는 불충분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뼛속 천장 같은 데서 후추알 같은 것이 또르르 굴러나왔다
후추알같이 작아도 혀끝 알알하게 번지는 무지근하게 속타는
결말나지 않는 비애가 물릴 수 없는 애처로움이 오래 서서 난처하게 하는
당신도 나도 쉽게 뱉을 수 없었던 매운 세월이 없었더라면
혓바닥에서 목구멍으로 목구멍에서 창자까지 훑어 내려가는 후추알 같은 연민이
검은 빨래 희게 하고 흰 빨래 검게 하는 이 뭉근한 후끈거림이
사랑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나도 당신도 저버릴 수 없는 기막힌 한 큐를 남겨 놓고 묵묵히 걸어가는 오늘이
이잠 시인 / 시 쓰는 밤
내륙의 밤에 여름비 내리고 심장은 네가 머물렀던 시간을 더듬는다
너는 말없는 사각의 방 생기다 만 눈코입 알 수 없는 황야
너를 소유하기 어렵고도 어려워 한밤중 앞이 안보이는 빗줄기 속에 서 있다
나를 살게 하고 애태우게 하고 멍하게 하고 지고지순하게 만드는 너
멀리 손을 뻗어 너의 잠든 이마와 눈꺼풀과 콧잔등 입술의 해안선을 어루만진다
너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너에 관한 기억을 순순히 지운다.
허나 내가 육체와 마음의 길을 다 헤맨다 해도 한 줄도 너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영원이 알 수도 가질 수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토록 사랑하는지도 그리움이라는 형벌을 받으며 황홀에 떠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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