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진 시인 / 노을
맨발에 밟힌 햇살이 움찔한다
되는 대로 묶어놓은 주둥이를 풀었다 잊을 만하면 컹컹 짖을 뿐 이제 집에서 멀리 걸음을 떼지도 않는 마음 한 줌 꺼낸다 잘 불려서 흰 쌀 위에 얹어 밥을 했다 뜸이 들어 포실한 온기
발바닥에 밟힌 햇살을 손으로 훑어낸다 햇살이 떨어져나가 움푹하게 빈 곳은 곧 메워지겠지만
내가 흘려놓은 한 톨이 박혔던 자리
유수진 시인 / 앞니
밤새 끙끙대다 동네치과를 찾아갔다 한 달 생활비의 삼분의 일을 주고 나왔을 때 그날 하늘은 아말감 같은 회색이었거나 또는 아말감 같은 은색
잔뜩 긴장한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 채 턱 끝까지 벌린 입을 조금 오므려 뒷부분이잖아요 색이 달라도 괜찮지 않나요 스물 살 여자의 앞니를 파헤친 중년 의사가 쓰고 있는 하늘색 마스크를 턱 밑까지 끌어내렸다 푸른 멍이 든 것처럼 보일 겁니다 마구 뽑아낸 파밭처럼 앞니는 파헤쳐졌고 대기실에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가슴엔 시뻘겋게 번지는 녹물
그 후로 여러 달 쪼들렸던 것인데 아직도 혀로 더듬을 때마다 여전히 치과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리는 스물두 살을 지나는 풋사과 한 알 뭉텅뭉턱 떨어져 나가는
연두색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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