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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성수 시인​​ / 속이 보이는 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2.

서성수 시인​​ / 속이 보이는 산

 

커다란 뱃속에 들어왔다

능선으로 주름진 점막에

끈끈한 초록의 점성을 가진 숲

햇살도 한풀 꺾여서 소심하게 내려앉는 골짜기

갑자기 다가오는 비릿한 짐승의 울음소리

덜컥 내려앉는 겁 많은 허파의 돌기 사이로

산안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를 삼킨 사나운 이빨과 냉정한 목젖을 지나

긴 식도를 지나왔을 것이다

날카로운 너덜과 가파른 된비알에

골짜기는 더 깊숙하게 들어서고

나지막이 내려앉은 하늘과 구름을 떠받치는 등뼈를 찾아가면서

그의 내력이 적힌 뼈마디 사이 책갈피를 넘겨보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낙엽의 전언

 

여기도 강물이었던 적이 있어 물결 굽이쳐 흐르고

저기도 바다였던 적이 있어 푸른 속에 파도가 일렁이고

그기도 하늘이었던 적이 있어 구름은 몰려다니고

돌아눕는 등허리 뼈마디에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

 

실핏줄처럼 물길이 나누어지고

체액이 가지런히 흘러가면서

숨을 쉬고 맥박을 뛰게 하는 갈색의 장기들

분해해야할 섬유소는 능선마다 펼쳐져 있고

소화를 마친 영양소는 바위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한 생애 고스란히

새겨놓은 산

그 속은 잔잔한 바다를 닮아 있다

 


 

 

서성수 시인​​ / 산골 세탁소

 

 

어제는 노루가 빨랫감을 잔뜩 들고 다녀갔지

바지는 기장 줄여달라고 하고 울 스웨터는 손빨래를 부탁하고

흰 바람막이에 묻은 오딧물도 뺄 수 있냐고 묻고

하얀 털 보송보송한 궁둥이 흔들며 돌아가고 나니

비목나무 잎 향기가 한참동안 나는데

벤젠 기름 냄새 보다야 건강하고

탁월한 세정 효과 기대해도 되겠다.

 

각재목 가로 걸치고 지붕 올린 처마 밑에

웃옷이랑 바지들 걸어놓으니

멀리 산 능선 짙은 녹음에

모두 초록물이 드는 건 아닌지

 

돈벌이가 될까 모두들 염려했지만

까마귀도 한 번씩 외투를 맡기고

오소리 너구리도 묵은 때 빼달라고 외출복 가져오고

함박꽃 꽃무늬 드레스 입고 작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순도 99프로 맑은 바람 속 피톤치드가

세탁기 안에서 몇 바퀴 돌아가고 나면

단골손님이 만족하는 상큼한 새 옷 냄새가 되살아난다고

달콤한 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잠을 깨고 보니

어제 밤 세탁기에 넣어

밤사이 다 돌아간 빨랫감이

마른 햇볕에 널어달라고 야단이었다

 

 


 

 

서성수 시인​​ / 약산골, 2월

 

 

창문 안에는 이미 겨울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물푸레나무는 이미 다이어트 중이라 허리에 군살이 보이지 않는다

고로쇠나무 당단풍은 얼굴에 영양팩을 바르고 수분 보충을 하고 있다

열매를 모두 중간상인에게 넘겨준 다래는

넝쿨 안에 약간의 비상금을 꼬깃꼬깃 숨겨 두었다

소나무도 늦잠에서 일어났는지 상록의 이불을 널어두고

비탈면 경사가 버거운 참나무 몇몇은 벤치 프레스로 몸만들기에 열중이다

 

돌무더기 너덜 한쪽에 독신의 오소리 원룸에 창문이 열리고

가끔씩 불안한 걸음걸이의 고라니가 안을 기웃거리다 돌아 선다

이 동네에서 제일 바쁜 다람쥐는 또 새로운 알바를 구하려고

교차로 구직 광고란에 연신 싸인펜을 긋는 중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까마귀는 아침저녁으로

바위 틈 깊숙한 곳까지 수상한 이웃들의 동태를 탐색하고 있다

 

퇴적암의 날카로운 예각이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북사면에는

표면이 둥글둥글하여 다산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낭설로

화강암을 수입해야 한다고 신용장을 개설해주고

기후변화에 무감각해진 영지나 상황 같은 약용버섯 당원들이

항암이나 혈액 순환 개선 등의 약효를 강조하는

새로운 공약을 개발 중이다

 

창문 안에는 여전히 겨울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계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곳 채널의 아이피 주소는

추위가 보석처럼 열리는 겨울나라

 

*약산골 : 속리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성수 시인​​ / 라면 먹을까

 

 

물이 끓으면

산에서 막 데려온 목이버섯 말랑말랑함을 넣고

노루궁뎅이버섯 보드라움과 엉큼함을 넣고

먹버섯 시커먼 속살도 넣고

 

골짜기를 건너고 능선을 넘다보면

나는 자꾸 작아지고

어느 순간 산 속은 커다란 우주가 되어 있다

 

키 큰 나무는 행성을 이고

주위에 작은 넝쿨은 위성이 되어 공전하고

물소리 바람소리는 주파수가 다른 전파를 발신하고 있는데

 

어느 별에서 왔는지

덤불 속에서 안테나 곧추 세우며 우주선이 불시착한 곳

싸리버섯 무더기가 줄지어 모여 있다

 

물이 넘쳐서 뚜껑을 열 때

함께 터져 나오는

산과 계곡과 능선이 만든 맛과 향이

 

그때 그 여자의 체취를 닮아 있다

아픔과 연민과 사랑이 한 몸으로 뒤섞여 뜨겁기만 했던

떠나가려는 손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꽁꽁 묶어 같이 울었더라면

 

어느 곳에선가 살아있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은 생각하고 있다고 보고 싶기도 하다고

그렇게 둘만의 암호로 전파를 발신해준다면

 

한나절 산에서 따온 별똥별 한 보따리

어깨에 동여 메고 달려갈 텐데

가쁜 숨 기꺼이 뱉어내면서

 

2022년 《시와 경계》 등단시

 

 


 

서성수 시인

대구 출신. 경북대학교 졸업. 2022년 《시와 경계》를 통해 등단. 1970년대 후반 대구에서 문청 시절 〈계단〉, 〈백야’〉동인으로 활동. 2006년 백두대간 종주 후 속리산 만수리로 귀산, '피앗재 산장'을  운영하고 있음. <보은문학회>와 <풀꽃수필>, 대전시민대학 <테마가 있는 에세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수필전문 문학지<수필과 비평>에 '반지와 과메기' 란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