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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차성환 시인 / 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3.

차성환 시인 / 꽃

 

 

 등에 꽃이 피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피어 꽃은 안전하다 나는 불안전하다 꽃의 뿌리가 간지럽고 근질거려 애인에게 뽑을 것을 지시했지만 애인은 거절한다 애인은 채식주의자다 꽃을 사랑한다 꽃봉오리가 만개하면 잡아먹을 심산이다 나야 꽃이야 다그쳐도 살살 등만 긁어줄 뿐 꽃은 뽑지 않는다 나는 윗옷도 입지 못하고 등짝을 열고 다닌다 꽃이 죽으면 애인한테 나도 죽는다 나는 정작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잎의 개수와 색깔을 맞춰보라고 애인이 퀴즈를 낸다 있지도 않은 꽃이 피었다고 한 건 아닌지 미심쩍지만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요즘 애인하고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내가 쓸모 있어진 것 같아 나쁘지는 않다 가려움에 환장하겠지만 우리 둘은 내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꽃이 잡아먹히면 애인이 등짝에 호미로 밭을 갈아 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가 자랐으면 좋겠다

 

 


 

 

차성환 시인 / 나의 개

 

 

 시골장에서 까맣고 피부병이 걸린 못생긴 개를 샀다 귤 장수 할머니는 손목에 묶인 개 줄을 내게 건네고 노잣돈 2500원을 받았다 황천 길이 멀지 않았다나 이 불쌍한 것을 잘 부탁한다면서 앙상한 손으로 귤을 어루만진다 자세히 보니 귤에는 하얗고 푸른 곰팡이가 덮여있다 내가 지적하자 귤 장수 할머니는 아니야 아니야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귤을 바구니째 까 잡숫고 황천길로 떠난다 이제는 내가 널 돌보마 내가 너의 주인이다 개를 앞장 세워 걷는 마음은 이상하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나의 사랑스런 까만 개여 나도 개가 생겼다 혹시 썩은 귤 냄새나는 할머니가 그리운 거는 아니지 썩은 귤을 먹으면 썩은 귤밖에 더 되겠니 우리 집에 가서 목욕도 하고 밥도 먹고 같이 잠도 자고 산책을 하며 지는 해도 같이 보자 나는 혼자고 끝까지 혼자고 혼자여서 내가 외로울 때 너는 작고 붉은 혀로 내 발등을 핥고 나는 네 검은 털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 주리라 개는 글썽이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우쭐거리다 순간 줄을 놓쳤을 때 빈 벌판으로 쏜살같이 도망치는 나의 개여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지평선만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밤의 지독한 어둠 속에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 저 빈 들판에 너의 무덤만이 있다 금세 허기진 얼굴로 굶주린 배로 풀이 죽어 다시 내게로 돌아올 나의 개여 허옇게 튼 입술을 달싹이며 배고파서 그랬어요 말을 하면 나는 아이고 배가 고파서 그랬구나 호주머니에서 기쁘게 귤을 꺼내 주리라 까맣고 못생긴 작고 슬픈 나의 개여

 

 


 

차성환 시인

2015년 《시작》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와 연구서 『멜랑콜리와 애도의 시학』이 있음. 2018년 〈시작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