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걸 시인 / 긴 침묵
대갈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아이는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아침이면 그 아이는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이슬을 보면서 맑게 웃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그 아이는 잠자리 날갯짓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돌멩이를 던져대던 우리가 그 아이의 머리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큰 머리를 번쩍 들고 저수지로 뛰어든 뒤부터였다 서울에서 놀러 온 여자아이를 악착같이 저수지 물 밖으로 밀어낸 뒤부터였다 그날 이후, 어느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저수지와 먼 곳에서 놀았고 저수지를 빙 돌아 먼 길로 학교에 다녔다 여름이 되면 갈라지는 논바닥 때문에 동네 어른들이 양수기 호스를 저수지에 담그며 간간이 혀를 찼을 뿐 우리는 머리가 다 굵어지도록 그 아이에 대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보름달을 삼키고 말이 없는 저수지처럼 썩지 않을 침묵을 오랫동안 일관一貫하였다
손병걸 시인 / 놓고아줌마
이곳저곳 떠돌 때 정착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첩실 노릇도 마다치 않다가 떡 하니 술집 간판 내걸었다 지서장, 면장, 남정네들 야들야들한 손목 잡아당겼고 그때마다 놓고, 놓고, 목소리 간드러지다고 소문났다 숱한 아픔 참아가며 지어놓은 자식 농사 가을걷이 때 본가에서 거두어 갔고 그 곱던 손등에 검버섯 피니 손님도 끊겨 간판 내린 지 오래 머리 큰 자식들 제 어미 아니라며 아무도 찾지 않는데 행여 행여 기다리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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