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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병걸 시인 / 긴 침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7.

손병걸 시인 / 긴 침묵

 

대갈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아이는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아침이면 그 아이는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이슬을 보면서 맑게 웃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그 아이는

잠자리 날갯짓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돌멩이를 던져대던 우리가

그 아이의 머리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큰 머리를 번쩍 들고 저수지로 뛰어든 뒤부터였다

서울에서 놀러 온 여자아이를

악착같이 저수지 물 밖으로 밀어낸 뒤부터였다

그날 이후, 어느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저수지와 먼 곳에서 놀았고

저수지를 빙 돌아 먼 길로 학교에 다녔다

여름이 되면 갈라지는 논바닥 때문에

동네 어른들이 양수기 호스를 저수지에 담그며

간간이 혀를 찼을 뿐 우리는 머리가 다 굵어지도록

그 아이에 대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보름달을 삼키고 말이 없는 저수지처럼

썩지 않을 침묵을 오랫동안 일관一貫하였다

 

 


 

 

손병걸 시인 / 놓고아줌마

 

이곳저곳 떠돌 때

정착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첩실 노릇도 마다치 않다가

떡 하니 술집 간판 내걸었다

지서장, 면장, 남정네들

야들야들한 손목 잡아당겼고

그때마다 놓고, 놓고,

목소리 간드러지다고 소문났다

숱한 아픔 참아가며 지어놓은 자식 농사

가을걷이 때 본가에서 거두어 갔고

그 곱던 손등에 검버섯 피니

손님도 끊겨 간판 내린 지 오래

머리 큰 자식들 제 어미 아니라며

아무도 찾지 않는데

행여 행여 기다리며 산다

 

 


 

손병걸 시인

1967년 강원도 동해에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1997년 베체트씨병'으로 두 눈 실명, 시각장애 1급 장애 판정.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저서로는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와 수필 『어둠의 감시자』 등이 있음. 2006년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예술인상, 중봉조헌문학상 등을 수상.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