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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희림 시인 / 붉은 신호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7.

고희림 시인 / 붉은 신호등

 

 

사후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 같이 질긴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음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 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내가 진짜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 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환상 때문인가

 

 


 

 

고희림 시인 / 사랑의 미래

 

 

-1960년,

메카나기*가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간 지 한 시간만에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을 선언한다-

 

그 해 뜨거운 윤달,

화산과도 같고 깊고 어두운 우주의 빛 사이로

엄마와 아빠의 나뭇잎이 나부꼈다

밤이슬 데구르는 소리

마구 흔들리던 빛그림자

나는 엄마의 바다에 적을 두고

빛나는 들풀 땅굴토끼 질주하는 낙타 늑대여우 회오리 바람같은

육지에 몸을 던졌다

창문 너머 지붕을 타고 하늘을 날듯이

 

--1987년,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도 모른 채 서둘러

한 아이를 품었다

창문 너머 지붕을 타고 하늘을 날듯이

아이는 행복했을까

나는 울었고

너를 보물단지라고 했으니

그 긴 싸움의 과정을 한꺼번에 뱃속에서 마친

너를 나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

 

--2014년,

'엄마 아빠가 사는 세상은 무척 힘겨워 보였어요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제 못된 성질을 서로 부려요

그러셨듯,

빛나는 들풀 땅굴토끼 질주하는 낙타 늑대여우 회오리 바람같은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태어나기도 전에 애인의 자궁 속으로 사라진

21세기 저의 아이는

미래의 존재인 세상의 유령이 되어 떠돌아 다닙니다‘

사랑의 미래에 대해 이제 말해 주세요

 

--나는 나의 아이에게 젖통같이 푹신한 두부를 목젖으로 넘겨주며

‘죄가 많다’라는 말을 했다

아이도 두부처럼 값싸고 고소한 엄마의 눈물에 젖었다

현실의 식탁엔

나도 엄마젖처럼 늙어 땀 흘린다

 

집 밖에는 새로운 태양이라고 뭐 특별한 게 없었다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 오늘은 한국과 한국민에 대하여 해외에 있는 많은 나라 사람들도 오래도록 기억하여야 할 날이다. 나는 당국자들이 국민의 불만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는 길로 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법과 권위에 대한 존엄성을 보여줄 것을 믿으며 조속히 국민들의 유용한 과업이, 일상 직무가 이 위대한 국민의 안전과 안녕을 그리고 번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향하여 나아갈 것을 믿는 바이다. 이것은 이 날을 영예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전폭적인 후원을 계속할 것이다(fork you!)

 

 


 

고희림 시인

1960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과. 2009년, 대구문학상 수상. 1999년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2003년, 시집 『평화의 속도』 펴냄. 현재, 남부도서관 맟 대구교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민족문학작가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