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시인 / 토마스 S, 엘리엇을 추억함
엘리엇, 엘리엇 당신의 수염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가람마살라 향료를 뿌린 것처럼 매캐한 골목골목의 유적지들 당신은 20세기가 버리고 떠난 거리에 이상한 섬 하나를 일컬어 황무지라 불렀지
The Waste Land!
누가 버리고 떠난 쓰레기 산더미인가 시즙屍汁이 흘러 폐적지廢積地 아래 검은 지하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엇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 사이 테임즈 강은 늙어 런던브리지 훨링다운 훨링다운 퇴사를 긁어낸 강상에는 다국적 관광객을 가득 태운 유람선이 오간다
*
나는 아무 말이나 뿌리고 다녔노라, 번안 없는 주술呪術 5대양 6대주를 유랑하는 언어들
물푸레나무 희멀건 그늘에 피부색 검은 꼬리가 달린 언어들. 낮은 지붕마다 낙뢰처럼 떨어져 피뢰침에 참수 당할까봐 여보게, 밀레니엄의 전사들이 낮도깨비같이 몰려온 거라지? 낯선 도시의 오픈카페에 앉아 검색창을 두드리는 젊은이들. 머리 위로 낯선 신생국의 깃발 펄럭펄럭 이상한 엠블럼이 찢어지고 총알 맞아 눈알 빠진 까마귀 떼들. 몰려다니는 통행인의 어깨 위로 흰 연기 베르게르제 같은 저녁안개가 슈테른베르크 궁전의 농무 속에 섞인다 잠꼬대처럼 엘리엇, 엘리엇 어디 있어, 어디 있는 거야? 지난 계절엔 엘니뇨에 물이 불어 집채만 한 욕망이 수몰 당했다. 땟국물 절은 셔츠깃에 물고기 무늬를 새긴 신앙심 깊은 노인들은 외쳤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 Sabaqtani~.토마스 엘리엇의 명성을 알 리 없는 군중들.
*
여름은 장마 끝에 호프가르텐 호반에 거짓말 같은 무지개를 걸쳐두고 떠났다, 라고 그는 썼지, 엘리엇은 썼다
거짓말, 거짓부렁, 거짓의 뿌리였다고 표기하고 싶은 뿌리가 약한 낱말들 나는 코비드19로 문 닫은 팬데믹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지난 세기에 찌그러트린 깡통 걷어차듯 걷고 또 걷는다
마리, 마리 이것 좀 도와줘!
너무 먼 인척의 마리 그녀는 국적 없이 미아로 떠도는 소녀였을까 마리우폴의 길바닥에 모가지 잘린 채 버려진 바비인형처럼 머리카락 짓이겨져 폐기물로 방치된 마리 어린 소녀 마리 이종사촌 누나뻘도 아니고 누구의 이웃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닌 마리는 나의 여동생 피투성이 혈연 엘리엇이 마리를 알 리 없지 전혀 모른다
흑해의 오데사항구와 테임즈 강가의 코스모포리탄 런던 런던타워를 거슬러 임진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어디쯤 도라산역을 한 바퀴 돌아 나와도 그토록 단련된 그토록 잘 담금질된 당신의 언어
엘리엇, 황무지에 빈출하던 라마 사박다니는 어디로 갔는가 그토록 많은 어휘들이 그토록 쓸모도 없는 절규로 구소련제 장갑차 포격에 박살나버리듯 팔다리 부러져 공중 분해될 줄이야
월간 『현대시』 2022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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