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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요 시인 / 여우를 피하는 방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7.

김지요 시인 / 여우를 피하는 방법

 

 

한 고개를 넘어도 여우가 있네

두 고개를 넘어도 여우가 있네

놀이가 끝나지 않았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두려웠지

밤이면 누군가 성냥불을 그으며 속삭였어

도망가고 싶으면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렴

그래 더 깊은 곳으로 기어 들어갔지

꼬리를 자르고도 새로 돋을

목숨이 내겐 없었어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밤,

어둠속에서도

거추장스러운 줄기를 뻗어가는

늙은 감자가 되어갔어

쭈그리고 앉아 여우가

내게 찾아오길 기다렸어

잠잔다, 밥 먹는다, 무슨 반찬에

어느 순간 여우가 두렵지 않았어

거꾸로 된 문장들을 읽어 내리며

마지막 성냥을 그었어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

거기가 어디냐구?

엄마의 지문이 묻어 있기도

할머니의 지린내가 배어있기도 한

돌무더기가 가득한 고개 말이야

 

 


 

 

김지요 시인 / 멈춰버린 심장처럼

 

 

폭설이 내렸습니다

검은 까마귀 떼가 설원을 날았죠

12월의 사라오름엔 흑과 백

두 가지 색만 남았어요

 

종아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눈 보다

당신의 침묵이 더 서늘했어요

결빙의 호수를 가로질러 간

선명한 발자국만 남았죠

 

압 안의 말은 더 이상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아요

 

당신에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어리석게도 마음을 가지려 한 적 있어요

 

호수를 삼킬 듯이 눈이 내리고

얼음심장으로 숨을 쉬는

호수와 함께 하얗게 지워져 가요

 

귀가 먹먹하게 내리는 눈발이

돌아갈 길을 숨겨 버린 지금

 

눈이 멀어 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김지요 시인

1965년 전남 보성 출생. 2008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붉은 꽈리의 방』(지혜사랑, 2016)가 있음. 제5회 애지문학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