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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재리 시인 / 후일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7.

정재리 시인 / 후일담

13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스크 씨는 잠이 없는 사람 턱을 고인 채 먼 나라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들은 대로 그려 본다 잠이 안 와서

 

비늘로 덮인 고래의 몸과 두 발 달린 물고기를 그려 놓고 신중하게 세필로 서명한 다음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면 나팔 코를 치켜든 코끼리를

또 완성할 것이다 본 적도 없이

 

본 적도 없이 속을 보여 주는 일은

커다란 백지

얼마든지 접어 주고

접다 보면 사라지는 흰 새처럼 불길하고 아름다워서

 

자기 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깃털이 묻었나 하고

 

우리는 대양과 대륙과 세기를 넘어온 이 기이한 착오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추측하느라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다 한 복도를 지나 다음 복도가 끝날 때까지

할로겐 조명에 구두 끝을 맞추고 서 있다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상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결국은 카스크, 그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누군가 귀 기울여 주어서 밤이 온다

파도가 온다

보글보글한 양 떼를 몰고 와 백사장에 부려 놓는 꿈을 꾸면서

놀라 뒤척이면서

 

푹 자요 카스크, 내일은 우리

날씨 얘기나 해요

계간 『시인수첩』 2022년 제11호 발표

 

 


 

 

정재리 시인 / 어반스케처

 새 스케치북은 새로운 스케치북

 표지보다 내지가 더 두꺼운 프랑스산 세르지오 코튼 320 인사도 없이 받아 들었죠

 

 넘기면 다른 방향

 펼치면 상상 바깥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볼 것 대상을 포착하면 일단 점찍고 볼것 직관을 믿지 말 것

 설명하는 선생님은 싱글 외로워도 싱글싱글

 이별 경력 한두 번이란 몇 번인 걸까 나는 묻지 않고

 

 물을 떠 왔어요

 

 예리하고 수정 불가한 족제비 붓을 돌아선 다섯 번째 첫사랑에게 겨누죠 꽃에게 꽃말은 거짓말같이 들려서 창문을 덧칠해 버렸어요 망하는 줄 알면서도 붉은 물감을 풀어 불 지르는 불가능 불면 불쌍 불륜 불조심……

 

 농담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없이 퍼지네요 전염병처럼

 

 그러나 100% 코튼은 미더운 질감

 스미기 전에 눈가로 번지는 푸른 물의 기법

 숨어 우는 것보단 나으니 곧 다 나을 거예요

 

 기억에서 추억을 빼면

 섬이 되는 시절

 

 그리워하면 그리는 사람이 되죠

 꽃범의꼬리 같은 꼿꼿한 붓을 들고 눈에 불을 켜면 못 갈 데가 없다니까요

​​

년간지 『미래서정』 2022년 제11호 발표

 

 


 

 

정재리 시인 /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에릭은 아주 자그만 외국인 손님 꽃잎보다 가는 손을 흔들며 떠나는 그림의 주인공

 

 나는 14쪽 아래 ‘어느 날 이른 아침 갑자기’를 따라 써 놓고

 돌아올 거예요 혼자 말해 본다

 생일 파티가 연기되다 사라진 겨울

 

 멀어지는 속도가 뒤돌아보는 속도보다 빨라서 귀가 밝아진 듯 먹먹한 듯

 질문을 하기도 전에 답을 들었지

 물을 발라 물길을 낸 다음 물감을 흘리면 경계선이 되고 여행이 되고 새의 날개나 말의 콧잔등도 그렇게 태어나곤 한다는

 

 순서는 지겨워

 그리기도 전에 고삐를 지워 버릴 거예요

 집도 짓기 전에 마을로 초대할 거예요

 약속하기도 전에 악수하고 헤어진다 해도

 

 기다리기도 전에 와 있을 게 뻔하잖아요

 나는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가 있을 거잖아요

 

 물은 온 길을 거슬러

 태어나기 이전의 구름으로

 구름 그림자 아래 멈춰서

 함께 비를 맞던 여름으로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호주 작가 숀 탠의 그림책.

월간 『모던포엠』 2022년 3월호 발표

 


 

정재리 시인

1999년 한국문인협회 수원 지부 시 부문 신인상. 2017년 ≪서정시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파란, 202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