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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재 시인 / 식탁은 지구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6.

이문재 시인 / 식탁은 지구다

 

 

중국서 자란 고추

미국 농부가 키운 콩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포르투칼에서 선적한 토마토

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

식탁은 지구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고추며 콩

석류와 토마토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삼십여 년 전

우리집 둥근 밥상은

우리 마을이었다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이 먹을거리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뭇 생명들 올라와 있는 아침이다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이다

 

식탁이 미래다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

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날이 새날이다

그날부터 새날이다

 

 


 

 

이문재 시인 /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치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 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궈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 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이문재(李文宰) 시인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1982년 《시운동》 4집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1988), <마음의 오지>(1999), <공간 가득 찬란하게>(2007) 등이 있다. 2005.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