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인 / 연습
한잠 자고 일어나 보면 당신은 먼 태양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 얼마 뒤, 불편한 안개 뒤편으로 당신은 어 엉거주춤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낯설게, 시체 나라의 태양처럼 차갑게. 나는 그 낯설고 차가운 열기에 온몸을 찔리며 포복한 채 당신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거북스런 안개가 걷히고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우리의 사랑도 속수무책 거미줄만 깊어 가고, 또 다른 해가 차가운 구덩이에 처박힌다.
최승자 시인 / 비가 와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이 떨어질 때 바람은 왜 살짝 멈추는 걸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없는 코스모스들이 왜 늘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모슬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그 무슨 메아리들이 왜 아주 아주 멀리서 들리는 걸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카페 창가를 다 적시고 있네 넋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 적시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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