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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명옥 시인 / 흔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6.

안명옥 시인 / 흔적

 

 

자동차가 제 생의 속도로

길을 질주한다

속도는 자동차를 앞지르다

자동차를 버린다

 

자동차는

길을 버리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원해

구름 속으로 다가가

집이 된다

 

집이 느리게 걸어간다

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내며

다음 생엔 빗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저 집

 

조바심 나는 희망 같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집

 

저 집 창문엔 풀벌레 소리 들리고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인

누군가 찍어놓은

붉고 푸른 지문 몇 개 얼룩져있다

 

 


 

 

안명옥 시인 / 기념일이 나를 식물로 재배하고 있다

 

 

아내의 날 결혼기념일 부부의 날 생일날

기념일마다 나는 홀로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식도에서 소장까지 꼭꼭 씹어 천천히 먹는다

뜨거운 입술을 기념하고

신경성 위염을 앓던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뭐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어제까지 처녀였던 나에게

결혼은 아내, 어머니로 만들어주는데

 

기념일에는 기념할 외로움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절망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불행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꽃이 있는 법

 

4월은 일 년 중 달(月)이 가장 큰 달이라니

나의 결혼기념일과 내가 태어난 날이 있다

4월에 나는 아들을 낳았다 4월에 태어난 사내 사이에

 

마야코프스키는 4월14일에 죽었다

카프카는 마흔에 죽었는데

4월에 나는 연희문학촌 독방에 앉아 기념일마다

난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비 한방에

사라지는 벚꽃들을 기념하고 있다

 

사람은 역경을 거치면서 현명해진다는데

난 날마다 자본주의 속에서 바보가 되어간다

기념일이 날 식물로 재배했다

도망갈 수 있는 동물과 다르게

도망갈 수 없는 식물은 독을 지니게 되었다

 

이번 생의 바다에선 유행 같다

누군가 자꾸 기념일을 만들고 있다

용산을 지나다가 용산 전쟁기념관을 보면서

전쟁을 다 기념해야 하냐고 돌에게 묻고 싶었다

 

 


 

안명옥 시인

2002년 《시와 시학》 봄호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수학. 시집으로 『칼』과 『뜨거운 자작나무숲』과 『달콤한 호흡』 출간. 서사시집 『소서노召西奴』, 장편  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출간.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 시인상 우수상, 김구용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