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승자 시인 / 연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6.

최승자 시인 / 연습

 

 

한잠 자고 일어나 보면

당신은 먼 태양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 얼마 뒤, 불편한 안개 뒤편으로

당신은 어 엉거주춤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낯설게,

시체 나라의 태양처럼 차갑게.

나는 그 낯설고 차가운 열기에

온몸을 찔리며 포복한 채

당신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거북스런 안개가 걷히고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우리의 사랑도 속수무책 거미줄만 깊어 가고,

또 다른 해가 차가운 구덩이에 처박힌다.

 

 


 

 

최승자 시인 / 비가 와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이 떨어질 때

바람은 왜 살짝 멈추는 걸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없는 코스모스들이 왜 늘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모슬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그 무슨 메아리들이 왜

아주 아주 멀리서 들리는 걸까?)

 

비가와-

삼천포에 비가 와-

카페 창가를 다 적시고 있네

넋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 적시고 있네

 

 


 

최승자 시인

1952년 충남 연기군에서 출생.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졸업. 고려대 재학중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 유신 시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학교에서 쫓겨남.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우리 시대의 사랑」 등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2001년 이후 투병 하며 활동 중단.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 2010년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2017. 제27회 편운문학상 시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