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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반연희 시인 / 비둘기 사육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7.

반연희 시인 / 비둘기 사육법

 

 

모자 속에서 비둘기를 꺼낼 수 있나요

 

광장의 뚱뚱한 비둘기들을 상자 속에 모아

 

오늘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요, 한 걸음씩

 

천천히 상자 앞으로 다가가

 

밖으로 삐져나온 부리와 발톱을 모두 자르시오

 

그림자도 상자와 닮아가는 완벽한 오늘

 

그저 눈속임의 하루를 즐기세요

 

사뿐사뿐, 소매 속으로 얌전히 들어가

 

오른 발이 한 일을 왼발이 모르게 외우시오

 

질문은 발목에 매달아 놓고

 

상자 밖의 구름처럼 모습을 숨기시오

 

준비된 내일을 위해

 

소매 속 비둘기 날개를 약간 비트시오

 

즐거운 일들은 모두 고통 위에 껴입는 겉옷 같은 것

 

커다란 모자 속

 

파닥이는 날개를 더 꾹꾹 누르시오

 

새를 흉내 내지 마시오

 

『다층』 (2017, 가을호)

 

 


 

 

반연희 시인 / 좁아지는 나와 늘어나는 물건들

 

 

 죄송합니다 나로 가득찬 방이 좁아 당신을 초대하지 못합니다 찻잔이 된 내가 오른쪽 손잡이로 흘러내리는 나를 따릅니다 뜨겁게 타오르다 눌어붙은 나를 지울 수 있을까요 나는 천장에 매달려 눈을 뜨고 잡니다 방 안 가득 내가 환해집니다 꺼졌다 켜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오시겠다면 당신도 켜드리겠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간을 밀어냅니다 당신을 끄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식지 않은 나는 따뜻하게 앉아 있습니다 구김 없이 빳빳한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나를 껴입을 또 다른 내가 줄지어 걸려있습니다 구겨진 어제를 털어서 펴두었습니다 당신이 정 오시겠다면 나였던 어제를 깔고 오늘의 나를 덮을 수 있겠죠 멈춰진 말의 두께가 두꺼워집니다 내 발들은 문을 닫고 이미 걸어온 길을 감췄습니다 버리고 싶은 나도 있지만 나를 버릴 수 있을까요 당신이 보지 않는 곳에 못난 나를 숨겨둡니다 나를 숨길 또 다른 내가 늘어나는군요 먼지 속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나에게도 빛나던 시절은 있었겠죠 우울해하지 마세요 곧 새로운 내가 배달 될테니까요

 

계간 『문학과 사람』 (2018, 창간호)

 

 


 

 

반연희 시인 / 당연한 질서

 

 

새로운 시작은 새의 날갯짓으로 시작됩니다

 

한 시절을 끌고 다니던 개때는

 

한 줄 바람의 문장으로 건너갑니다

 

새를 흉내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친 거미줄에 걸려 바스락거립니다

 

얼었던 혀가 이제야 녹습니다

 

한 순간 떨어지는 꽃처럼 화려했던 것들은 지고

 

잎들이 무심하게 피어납니다

 

뜨거운 전기줄 위로 발톱을 숨긴 새들이 날아듭니다

 

속지 않을 우리가 따뜻해지는 시간입니다

 

『다층』 (2018, 가을호)

 

 

 


 

반연희 시인

1969년 경남 사천 출생.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2001년 계간문예 《다층》 가을호에 사물A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다층문학회, 다층문학 편집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