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중 시인 / 창세기 1
둘이 기원이었다 혼자인 것들의 기원 몸의 혈액인 기원 손이 손가락을 낳고 얼굴이 눈과 코와 입을 낳고 귀를 낳고 나의 해골인 너를 위하여 너의 피부인 나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듣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맛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혼자 돌려주고
돌아오는 고요는 그냥 고요가 아니나니 시계를 향해 손을 뻗어 만나서 울지 않는 마주함 둘이 맞잡은 고요가 있다
마른 돌 위로 흐르기 시작한 첫 강물을 아직 강물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둘이 고요였다
김학중 시인 / 창세기 3
역사는 고물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물과 사물
쓰이고 지워진 것의 경계들이 남긴 물결 위에 떠 있는 건천 고물상 부서진 신전들의 더미
신은 마른 강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려 그 자리에서 껍데기를 벗겨 인류를 만들었다고 한다 화석인 채로 태어난 인간들은 살아가려고 동족을 먹어야 했다
그대로 두어라
잔인한 이야기들은 미끼도 없이 다시 걸린 낚싯대 나의 벌은 목이 마른 질문을 받는 것이다
오직 이 강의 순례자들만이 찾아와 창세전에 묵시록을 쓴 신에 대해 물었다 나는 조용히 화석이 된 나의 두개골을 열어 보였다
나는 종이요. 울리지 않는 종이요
그들은 질문의 값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두고 돌아갔다
창조란 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일 신이 우리에게 준 벌
나의 이빨. 말하지 못하는 이빨들은 삼키지 못하는 강의 뼈를 씹으며 입의 어둠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여기 사라지며 남겨진 껍데기들의 성지 고물상의 목록에는 역사가 없다
김학중 시인 / 창세기 7 ㅡ퀴푸의 노래
1
소멸한 문자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했어 모든 것이 창조되고 난 뒤에 소멸되는 일곱번째 날 소멸한 문자로 남겨진 날과 사라진 날을 엮은 노래를 다시는 부를 수 없다고 했어
2
네 머리를 땋으며 글자를 만들었지 내 말은 네 귓가에서 사라져 너의 머리칼 속에 깃드는 것들은 따뜻하게 어두워지는 잎사귀의 안쪽 손가락이 닿도록 볼 수 없는 너의 입 한 매듭을 만들 때마다 열렸다 닫히는 여기에 우주는 항상 뒷모습인 거니 풀을 흔드는 바람으로 널 엮어 글자를 만들었지 매듭이 만든 글자엔 이슬이 내려앉기도 하고 바람이 드나들기도 해 흔들리는 글자들의 머리채 숨은 숲으로 너를 안고 나는 길을 떠나 마디마디로 되돌아오는 말로는 다 말할 수가 없어서 노래해 노래의 숨이 만나는 길의 우주 적막 속에서 다 흩어지도록 사라지는 노래는 뒤로 뒤로 발자국도 없이 말없이 난 너의 전부를 안을 수는 없을까 어둠은 가까이 있을 때의 온도 나의 체온을 나눠줄게 따뜻해지렴 길 위로 오는 별의 눈물이 다 타도록 나는 읽을 수 없는 매듭을 묶고 있을게 머리채의 매듭이 늘어가도 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 문자 들리니. 여기 한 세계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질 거야. 그래 떠나 어두워진 일곱째 날의 숨 글자들이 남기지 못한 소리들을 가져가 노래가 끝나면 너의 매듭이 완성될 거야 내게는 항상 둘인 너의 귓가에 풍성한 머리채의 글귀
3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사라진 날이 있었고 그날의 노래가 있었다
*잉카의 결승문자를 말한다. 퀴푸는 새끼 꼬기와 같은 방식으로 중심이 되는 굵은 줄에 여러 가닥의 줄을 묶어 만든 문자이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지만 결승문자의 의미를 완전히 해독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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