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강 시인 / 육중한 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었다 내가 들어오고 뒤이어 누군가가 들어왔는데 먼저 도착한 이들과 함께 나도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열두 번째로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두 명만 더 오면 된다고 했다 우리를 양편으로 갈라놓은 긴 식탁 위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열세 번째로 도착한 이가 들어오고 바로 열네 번째로 도착한 이가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음식이 다 놓이고 문이 덜컹하고 육중하게 닫혔다 방은 관처럼 길었고 창은 감옥처럼 높았다 우리는 우선 차려진 음식부터 먹기로 했다
-시집 <회를 먹던 가족>에서
김승강 시인 / 장미의 기억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쳤다
그녀를 지나쳐 몇 걸음 뒤 나는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나를 지나쳐 몇 걸음 뒤 그녀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흔들렸다
장미 한 송이 길 위로 툭 떨어졌다
-시집 <회를 먹던 가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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