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숙 시인 /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정오는 정수리에 그림자를 이고 있는 시간이죠 밋밋한 그림자에 레이스가 필요해요
햇살을 주워 정오의 치맛단이나 소매 끝에 붙이면, 졸음이 나풀거리고 한 시가 되고 두 시가 되죠 그때 시간은 바닥에 눕거나 발목을 휘감고 비스듬하게 사람들을 따라다녀요
곧 기울어질 정오 이때 나무들도 바람의 레이스를 달고 제 키를 보여주죠 검은 레이스, 마치 우리가 명동 성당에서 본 미망인 프란체스카가 살포시 머리에 얹었던 검은 미사포 같아요 햇살이 돌아서면 눈부신 레이스도 사라지죠 모퉁이를 돌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정오는 지나가는 왼쪽의 방향을 갖고 있어요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당신 저는 당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해요 딱딱한 그 감정에 오늘은 레이스를 달아주고 싶은 날이에요
안은숙 시인 / 한 줌의 집, 납골당
그는 주머니 속에 갇혔다
농사를 짓던 그와 화르르 콩을 구워 먹었던 적 있다 우리는 가 끔 그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그의 몸이 부풀고 앉은 자리가 비좁아졌을 때, 문을 열고 나와 야 했다 콩꼬투리를 열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콩처럼, 마치 도 리깨를 맞고 튀어나온 콩들처럼 그가 뜻 모를 허공으로 날아올라 곤두박질쳤다
주머니에 갇혔다
세상에는 누군가 한 번도 손을 넣지 않는 주머니도 있다 말라서 틈이 생기는 계절 딱딱해져서 눈이 생기는 씨앗들처럼 구부러진 들판처럼 그가 날아간 사인은 어디에서든 밝혀지지 않았다
한 날 한 태에 매달렸던 여섯 개의 둥근 방, 볕이 잘 드는 방은 참으로 따뜻했다
화르르 불탄 콩꼬투리에 다시 든 독방(獨房) 저 묶어둔 콩 단 투두둑 털면 수천의 기일(忌日)이 튀어나올 것이다
한 줌의 집, 평생 그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생전의 들판에 콩들이 툭툭 터져 나올 것이다
안은숙 시인 / 정오를 탈수하고 있는 나무 곁에 걸려
푸른 상의만 있는 나무쪽으로 표백이 되는 얼룩이 있습니다 경 계를 지나가는 주름, 빗장뼈 닮은 정물 속으로 거푸집을 들이부 으면 한여름 가장 무거운 옷을 입고 있는 나무들, 온전한 몸을 이 끌고 검은 하체를 드러내고 있는 한동안 굳어가는 햇살이 있습니 다
피지 않는 봉오리 속으로 초여름을 들이붓는 나팔꽃잎들,
몸도 마음도 버릴 때가 있습니다 틈틈이 세제의 시간, 맹렬한 탈수의 시간, 정오를 탈수하고 있는 나무 곁에 걸려 마르다 흔들리다 늙어갑니다
안은숙 시인 / 배를 끄는 사람들*
배를 끄는 사람들, 물결이다 배는 물의 방향 키는 더 이상 풍향의 흔적이 없다
물결의 낯빛엔 거칠고 투박한 바다가 묻어있다 백 년 전의 노동이 색 하나 바래지 않고 이렇게 남아있다니 노동의 풍경이 명작이 될 수 있다고 백 년 동안 배를 끄는 사람들, 액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이다 밧줄이 물결을 지시하고 있다 뭉쳐져 이끄는 것은 간절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배가 물결을 탄다
물결은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녔고 왁자지껄한 선술집의 목소리를 가졌다 구령 소리가 붙어있다 방향이 막힌 곳과 부딪히는 또 다른 물결은 부푼다
뭍으로 올라온 부분은 물의 선두가 되고 부력이 빠진 배는 물의 위 물의 속도가 사라진 배는 지친 노동이고 부력이다 고장 난 물의 바닥을 수리하기 위해 배를 끄는 사람들 먼바다 물결이 얼룩처럼 보인다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는 어느 것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 일리야 레핀의 작품 : 볼가강의 배를 끄는 사람
안은숙 시인 / 쇠갈고리들 - 몸과 옷은 결국 묶이는 종족이었다
희망 정육점 차디찬 갈고리를 붉은 옷이 데우고 있다
사흘에 한 번, 육중한 남자가 탑차를 몰고 오면 무거운 외투가 뾰족한 갈고리에 내걸리고 불빛은 붉은 옷보다 더 붉어진다
떠나온 몸을 잊지 못하겠다는 듯 갈빗살에 뼈가 붙어있다 본래 그 몸도 어딘가에 묶였던 몸 한 드럼의 울음과 건초와 여물 먼 산의 구름 묶음과 우사(寓舍)의 지붕에 다발로 떨어지던 빗소리와 되새김 소리가 결국엔 모두 몸의 일부였다는 듯 뾰족한 곳에 다시 묶여 내걸린다 마지막 비명을 철렁 받아드는 쇠갈고리들
문득 내려다보면, 어느 것이 제 다리였을까 옷은 제 다리를 찾지 못한다
외출하고 싶은 핏물의 실밥들 배달된 외투의 솔기가 한 올 한 올씩 풀리고 있다 잠시 몇 벌의 옷은 근육질 남자의 익숙한 칼날에 조각날 것이다 쇠갈고리들, 옷을 입고 싸늘한 몸이 달아오른다
몸과 옷은 결국 묶이는 종족이었다 2022년 제3회 동주문학상 수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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