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연필 시인 / 사선서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8.

김연필 시인 / 교범

 

 

 나의 알루미늄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에 가고, 살곶이에 가고, 나의 왕십리에 가고

 

 나의 왕십리에 가서

 사랑하고, 나무로 된 사랑을 하고, 플라스틱 사랑을

 플라스틱 사랑에 맺힌 아름다운 나의 자전거를 타고

 

​ 살곶이로, 뚝섬으로, 한강으로, 여울로, 개울로, 나의 알루미늄

 물결로, 바다로, 파도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나의 알루미늄 자전거는 알루미늄 자전거

 너의 왕십리에 맺힌 알루미늄 자전거

 플라스틱 사랑에 맺힌 작은 플라스틱 인형, 손을 맞잡지 못하는

 

 나의 알루미늄 자전거를 타고 강으로, 산으로, 섬으로, 해변으로

 해변에서 자란 액상의 나무로, 나무는 물이 되고 물은 불이 되고

 불 속에 남은 물질, 나의 아름다운 사랑, 왕십리에 가서, 불타지 못하는

 

 나의 자전거가 떠난다 먼 곳으로 먼바다의 섬으로 뚝섬으로 밤섬으로 여의도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해변의 생활자를 생각하며

 자전거를 굴리는 나의 자전거, 바퀴가 없고 몸이 마디로 이루어진, 마디마다 석유가 맺힌, 그만큼 사랑하는, 해변에서 우리 같이 놀자, 나의 아름다운 살곶이 해변, 플라스틱 사랑이 자라는, 나의 꿈속 같은

 

 나의 자전거는 알루미늄 자전거, 알루미늄으로 만든 알루미늄 자전거

 내 듀랄루민 사랑처럼, 고무 지우개처럼 반복하는 나의

 

 너의 왕십리가 멀리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에 잔뜩 아름다운 살곶이 해변의 밤섬, 밤섬, 밤이 돼도 너는 나의 알루미늄 자전거를 타고

 

공시사 2022.01

 

 


 

 

김연필 시인 / 사선서사

 

 

마지막 이미지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빛이 비치는 숲속 두 마리 벌레가 만나 서로의 몸을 뜯는 모습이다

 

여기 벌레를 닮은 먹을 것, 오감으로 빛을 머금고 있다 그것은 처음의 이미지다

광선이 장면을 관통한다 한 인물이 한 인물의 입을 벌려 이를 뽑아내고

 

그곳으로 벌레가 진입한다 그것은 다정한 장면 그것이 모여 이루는 한 실체적 이미지

이를테면 지주와 소작농이다 하나가 걸어가면 하나가 따라가는

그 두마리 다정히 날아간다 벌레는 형상이 없고 벌레는 무게가 없으며

 

이런 이미지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 세상엔 다정이 넘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형은 그런 것 못 쓰잖아? 이런 것 이제 아무도 안 읽는데,

문학이 위로와 위안을 준다, 이런 거 중요하고

이런 어두운 대사는 누구도 내뱉지 않는다 빛이 비치는 숲속

 

그러니까 이건 양잠가의 이야기다 오늘 길에서 오디를 다 먹었고

짙푸른 옷에 하얀 실과 가루가 흩어진다 누에의 암컷은 날지 않는다

날개가 자라지도 않는다 고치를 떠나지도 다 큰 후에도 벌레처럼

 

우리가 먹었던 게 정말 번데기였을까? 라며 정말 아름다운 인물이 다정하게손에는 보라색 물이 들었고, 우리는 가물수록 더욱 짙고 달아서

 

까지의 이미지가 모두 벌레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빛을 따르는 이들의

솔직히 서사 제대로 안 갖춘 소설은 일단 평가에서 제외되는 것 같아 상업성이

 

같은 말들이 허공을 나풀거린다 나비의 움직임은 예측이 어렵고

대부분의 말은 자전거에 치여 죽는다 운동의 이미지는 시대만큼 명확하고

벌레는 형상이 없고 벌레는 무게가 없으나

 

이런 이미지는 감각의 이미지다 감각은 질량이 없고 감각은 실존하지 않아 푸른 옷에 하얀가루

 

어쩜, 문학은 이렇게 아름다울까? 예쁜 말 모여서, 다정하게 감싸고

문학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 같은 것이구나, 신성해서 신이 우리를 구하고자 내려주신

 

벌레를 닮은 먹을 것을 아름다운 연인이 씹는다 터진다 현재의 감각이다

 

태초의 이미지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벌레는 구원받고 벌레를 보라색 빛이 관통하고벌레의 뒤집힌 등에 아직도 생계가 매달려 있다

 

 


 

 

김연필 시인 / 조판수

 

 

 그래 사람이 책이 될 수도 있고 방이 될 수도 있고 주전자가 될 수도 있는거다. 문장이 될 수도 있고 활자가 될 수도 있고 김밥이 될 수도 있는거다. 김밥이 되어 책 속에 말릴 수도 있고 말린 속에 문장을 넣고 한번 더 말아도 되는거다. 주전자 속에 박아넣고 차를 우려도 좋고 차갑게 식혀도 되는거다. 문장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장기가 될 수도 있고 장기가 다시 활자가 되어 빛날 수도 있는거다. 조판수의 손가락 사이로 사람이 짜일 수도 있고 짜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짤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다시 문장을 짜고 문장을 책에 박아 넣을 수도 있고, 박힌 문장이 다시 너를 주전자 속에 털어 넣을 수도 있는거다. 하나씩 묻고 하나씩 대답할 수도 있는거다. 그래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책이 될 수도 있고 오래된 초상화가 될 수도 있고 구름이 될 수도 있고 노랗게 익은 개나리일 수도 있고.

 

 


 

김연필 시인

1986년 대전에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계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검은 문을 녹이는>, 7인 공동 시집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에 일곱 편을 실음. 유튜브 채널 ‘김줄스 Zoolskim’에 종종 출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