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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미애 시인 / 가방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8.

유미애 시인 / 가방

 

​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낡은 여행가방, 서른과 스물

끝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마흔에도

옆구리에 단정히 붙어 있었다

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저녁

정거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추억들이

어둠과 부딪히며 소스라치곤 했다 가방 속

손거울로 과거를 비추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방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린 날 거리에는 입 벌린

눈 번뜩이는 무수한 가방들이 보인다

그럴때면, 늑골 속

단단하게 굳어진 길 하나가 만져진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시 가방으로 들어간다

곧 문이 닫히고

그를 둘러싼 촘촘한 길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머리맡에 잠든 수없이

눈물로 채우고 엎지른 적이 있는 가방

어안이 벙벙해진, 말 잃은 가방이 늘어간다

 

 


 

 

유미애 시인 / 월곶에서

 

 

유선을 타고 바닷물이 흐를 때가 있다

끊어진 물길 가득 돌아오는 배들

간혹 월곶 소금창고에 수배전단지가 붙는다

추억의 세간을 달그락거리는 수상한 바람은

소금포대를 이고 집으로 가는 처녀의

배를 부풀렸다 벽보의 주문대로 애인을 갈아치운

창고지기 사내는 제 욕정의 크기만큼

바다의 허벅지를 떼어내 피를 말렸다

짓눌린 벽보의 얼굴이 창고로 숨어들자

홍안의 파도가, 둥근 무덤으로 남은

방파제를 두드린다 문득

캄캄한 유두에 혀를 대면 쏴아

바다의 비린 육질이 길을 뚫고 월곶

붉은 땅을 한 바퀴 돌아간다

내 오랜 연인은 서해의 후손이다

폐경 이후에 다시 수문을 열고, 바다는

바람으로 쓰레질한 진액을 말린다

온몸 가득 흰 소금꽃이 필 때까지

 

 


 

 

유미애 시인 / 사다리

 

사다리를 타는 한 여자가

허공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간혹 마당으로 별이 떨어진다

세상의 의미는 늘 위에 있고

사다리가 아니면 여자는

아래쪽에 붙박여 있어야 했으므로

심한 절름발이였던 여자 아래선

용접공이 그녀의 추락한 언어에

불꽃을 주사하고 있다 한순간

빛이 꺼지고 어둠 속 사다리가 흔들린다

두어 칸 더 오르기 위해

한 쪽 발을 떼어내자 기우뚱

짧아진 마음 쪽으로 하루가 기운다

용접공이 다리를 땜질한다

다시 사다리에 오른 여자

눈을 감는다

용접공의 손을 빠져나온 별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유미애 시인

1961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2004년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작〈고강동의 태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손톱』(문학세계사, 2010)과 『분홍 당나귀』(천년의시작, 2019)가 있음. 2019년 풀꽃문학상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