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석 시인 / 꽃
꽃은 우주다 꽃 속엔 먼 궤도에서 날아온 별빛과 유성처럼 빛나는 섹스가 있다 폭풍의 바다와 죽음 같은 쾌락 푸르른 인광(燐光)의 시간 꽃은 잎 벌려 세상을 받아들이고 팽팽하게 부푼 꽃잎들 위에서 세상은 비로소 적멸(寂滅)의 기쁨을 완성한다 그리하여 꽃 속에 저무는 세상은 얼마나 적막한가 이제 반쯤 걸어왔으니 문 닫히기 전 천천히 가자 온통 꽃길이다
오민석 시인 /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북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청량리역을 지나갑니다. 눈발 속에서 군데군데 시동을 끈 차량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기차는 검은 괴물인가요, 꿈쩍도 없이 이 추위 속에 멈춰 선 기차는 소리도 지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마음속의 광야에도 눈이 내리고 이 마음이, 멈춰 선 시간을 쇠망치로 두드립니다. 망치 소리 사이로 눈이 또 내리고 기차는 어느덧 왕십리를 지나 옥수동을 거쳐 서빙고로 달려갑니다. 언 강바닥 멀리 이 한밤중에 모래 채취를 하는 작은 포크레인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포크레인은 내 마음 같습니다. 눈발 속에서도 시린 눈을 깜짝이며 포크레인은 언 땅바닥을 파냅니다. 도저히 지지 않을 싸움, 자주, 민주, 통일의 길 위에 작지만 따순 발자국들이 모입니다. 발밑 세상은 동토입니다. 눈발이 차창을 가득 메우며 아우성입니다. 아우성치며 외칩니다 “기차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겨울통로를 힘차게 울리고 달려 그리운 것들을 마음껏 껴안을,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광야 위로 멈춰 섰던 기차들이 흰 콧김을 내뿜습니다. 어깨에 쌓인 눈들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조금씩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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