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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민석 시인 / 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2.

오민석 시인 / 꽃

 

 

꽃은 우주다

꽃 속엔

먼 궤도에서 날아온 별빛과

유성처럼 빛나는 섹스가 있다

폭풍의 바다와 죽음 같은 쾌락

푸르른 인광(燐光)의 시간

꽃은 잎 벌려 세상을 받아들이고

팽팽하게 부푼 꽃잎들 위에서

세상은 비로소 적멸(寂滅)의 기쁨을 완성한다

그리하여 꽃 속에 저무는 세상은

얼마나 적막한가

이제 반쯤 걸어왔으니

문 닫히기 전 천천히 가자

온통 꽃길이다

 

 


 

 

오민석 시인 /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북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청량리역을 지나갑니다. 눈발 속에서 군데군데 시동을 끈 차량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기차는 검은 괴물인가요, 꿈쩍도 없이 이 추위 속에 멈춰 선 기차는 소리도 지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마음속의 광야에도 눈이 내리고 이 마음이, 멈춰 선 시간을 쇠망치로 두드립니다. 망치 소리 사이로 눈이 또 내리고 기차는 어느덧 왕십리를 지나 옥수동을 거쳐 서빙고로 달려갑니다. 언 강바닥 멀리 이 한밤중에 모래 채취를 하는 작은 포크레인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포크레인은 내 마음 같습니다. 눈발 속에서도 시린 눈을 깜짝이며 포크레인은 언 땅바닥을 파냅니다. 도저히 지지 않을 싸움, 자주, 민주, 통일의 길 위에 작지만 따순 발자국들이 모입니다. 발밑 세상은 동토입니다. 눈발이 차창을 가득 메우며 아우성입니다. 아우성치며 외칩니다 “기차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겨울통로를 힘차게 울리고 달려 그리운 것들을 마음껏 껴안을,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광야 위로 멈춰 섰던 기차들이 흰 콧김을 내뿜습니다. 어깨에 쌓인 눈들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조금씩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민석 시인

1958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경희대학교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 당선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 평론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 『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 문학이론서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음.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