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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정숙 시인 / 무연(無緣)사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2.

배정숙 시인 / 무연(無緣)사회

 

 

 손전등만한 빛이면 족합니다

 

 무릎 밑으로 찬바람이 스미는 날 함께 늙은 누렁이가 한발 앞서 불안 쪽으로 다가갑니다 오로지 누렁이 외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녹내장 때문이라 믿습니다 두 눈에서 주르르 흐르는 외로움은 녹내장이 악화되어서라고 믿습니다

 

 한 달에 스무날은 병원 대기실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나무 밑 빈 의자에 앉아 북망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로 보냅니다

 

 봄은 키우지 않아도 잘 자라고 여름은 돌보지 않아도 씩씩하여서 가을은 스스로 성숙했습니다 하지만 겨울과의 경계가 젊음보다 훨씬 두텁다는 것을 터득하는데 생의 대부분을 써버렸습니다 비로소 슬하가 허전합니다

 

 그냥 막막하게 밤을 끌어당겨 눕습니다

 

 다시 새벽과 마주할지에 대해서 마음 쓰지 않기로 한 뒤부터 아랫목에다 울음 한 주발씩 묻어두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가을이 곱다고 낙엽이 진다고 여름날의 바닷가 민박집 근처로 주소 없는 편지를 띄웁니다 어쩌면 파도가 받아줄지 모른다는 아득한 생각입니다

 

 잔뿌리를 내려야하는 곳에 신기루란 이름을 끌어 써야 했으니 이 또한 허업(虛業)이었음을 고백하고 구름의 동공 속으로 찍는 발자국을 보아줬으면 좋겠다고 추신으로 적습니다

 

 서쪽하늘에 고독사한 별 하나 새벽달이 수습합니다

 

-시집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중에서

 

 


 

 

배정숙 시인 / 그들의 직립

-허수네 아비

 

 

 해가 지기 전 도착한 하루치의 어둠이 마른 억새들 사이에서 서걱거렸다

 

 출출해진 저녁 그믐달에다 눈물로 간을 하던 탄식에 버무리든 그 맛이 맵거나 말거나

 헐렁한 홑저고리 입성으로 동짓달을 견디기가 걱정되거나 말거나

 밀짚모자에 내려쌓인 눈이 불면의 쇠눈으로 굳어 어젯밤 눈썹싸움을 했거나 말거나

 

 새들은 장례행렬처럼 줄지어

 붉나무 서쪽으로 날아갔다

 

 겨울 허수아비

 늦가을 소나기가 빗금 쳐놓은 부분에서 해수(咳嗽)가 끓었다

 

 천지간에 관심 밖의 저 옆구리

 마른 쑥부쟁이 뒤로 바사삭 모로 눕는 한뎃잠

 별들은 젖어서 뜨고 정수리가 축축했으며 꿈자리가 냉골이었다

 

 외다리로 발붙이기가 전생이나 후생이나 한 통속이어서

 아슬아슬하던 어깨가 혼잣말처럼 기운다

 낡은 모자에 허공을 쓸어 담는 굼뜬 비질소리

 

 굽이굽이 이랑을 베고

 노을로 엮은 이엉을 당겨

 이제 와불이 되는 꿈으로 견딜 것이다

 

 무심히 스쳐 지나는 막차

 장파하고 돌아가는 허수네 아비들 몇

 

 


 

배정숙 시인

충남 서산 출생. 신성대학 복지행정과,  한국방송대 가정관리학과 졸업.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청아(靑雅). 시집으로 『나머지 시간의 윤곽』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