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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종수 시인 / 김밥천국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2.

손종수 시인 / 김밥천국

 

 

 착한 김밥들이 앉아 있는 대합실 매표소에서 잠시 눈치보다가 짬뽕라면 주문했어. 세상에, 누가 출발 직전 무른 표였다. 급행으로 나온 짬뽕라면 표정도 무뚝뚝한 홍합 홀로 우뚝 앉아 있었지. 죽어서도 입을 열지 않는 격렬한 침묵, 그 안에 웅크린 분노가 두려워 묻지 못한 건 아니었네. 그때, 입맛대로 말린 김밥들은 스티로폼 열차에 실려 떠나가네. 선한 영혼들아, 누군가의 피와 살 되어 부디행복해라.

 

 언제였나. 망망대해 난파선 마실 물 없어 바다 들이켰지.

소금기로 바짝바짝 타는 목구멍에 자꾸 바다를 퍼부었어.

바다는 물이 아니라 불이라는 걸, 재만 남은 꿈을 보고 알았네.

목이 말라 짬뽕라면 국물 한 숟가락 떠먹었네. 목이 말라자꾸 떠먹다가 마침내 그릇째 들이켰어. 실은, 짬뽕라면 국물도 물이 아니라 불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오랫동안 잊고 살았네. 행복한 건가.

 

 고향에 갈 수 없었던 그날 명절 앞두고 폐업한 공장 바닥에 주저앉아 소주와 짬뽕국물 들이켜며 온 세상에 쌍욕 퍼붓던 춘식이 선물꾸러미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영길이 낡은 가방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이제 행복한건가. 세상 바뀌지 않아도 차마 잊고 행복한 건가.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꿈은 늘 제자리로 돌아가네.

 

 


 

 

손종수 시인 / 거미

 

 

하필이면 거기,

뭐 하나 낚을 것 없는 곳

돌계단 후미진 구석에서

산 입에 거미줄 치나

장사꾼이라면 모두 외면할 한적한 도로변에

방물좌판 펼쳐놓은 늙은 여자의 하염없는 눈

어머니,

 


 

 

손종수 시인 / 엄마의 속병

 

 

어쩌다 맛있는 음식 밥상에 오르면

 

엄마는 늘 물에 밥을 말아 드셨지

 

천천히들 먹어, 나는 속이 좋지 않구나

 

-시집 『밥이 예수다』 중에서

 

 


 

손종수 시인

1958년 서울출생. 1986년 서울시립대 중퇴. 2014년 계간 《시와 경계》 등단. 2017년 첫 시집 『밥이 예수다』 출간, 2017년 대한바둑협회 스포츠공정위 위원장.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2019년 두 번째 시집 『엄마 반가사유상』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