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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호빈 시인 / 투석기(投石紀)의 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7.

최호빈 시인 / 투석기(投石紀)의 성

 

 

지원군이 올 때까지

낡은 갑옷을 걸치고 있는 이끼들

 

예전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살게 되는,

노을로 끓인 수프를 마시고 있는

저녁의 긴 공동체

 

무더위 위에 막사를 치고

해먹에 누운 돌은 지금 길을 잃었다

 

한편에선 죽으라는

한편에선 피하라는,

그렇게 병사들은 공중에 낱개의 정의(情意)를 걸어두었다

아침에 와서 저녁에 돌아가는

붉은 적군이 다시 올 때까지

 

숲과 뒤섞인 나무들 속에서

매복에 유리한 투명색의 휴식은

머리가 하얗게 센 약속들의 밀림密林

 

포말이 딱딱하게 굳어지길 기다리는 해변과 각기 다른 모양의 뚜껑을 덮어주는 묘지

그곳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몸을 팔았고

 

높은 곳에 있기를 좋아하는 꼭대기와

돌아가며 지구를 비추는 낮과 밤에 시선을 파는,

그 외의 사람들이 있었다

 

검은 깃털이 우글거리는 날개를 접기 위한

한때의 소란

 

얼룩을 가리기 위해 입었던 갑옷을 벗어

상처투성이의 성을 지었다

양쪽을 엿보는 데 정신을 판 구멍처럼

 

지원군이 올 때까지 우리는

 

 


 

 

최호빈 시인 / 보물섬의 날씨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갑자기 눈이 아름다워지는 날

밤이 이룩한 모든 것에는

싹을 틔운 나무의족도 포함된다

 

그 섬에 다녀온 후

 

걸었던 빗길을 떠올리며

감자 깎던 실바는

잠든 발에 슬리퍼를 신겨준다

가까이 다가가서

더욱 귀를 기울이면

풀숲에 바지를 적시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펼쳐진 채 엎드려있는 책 마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며칠

 

밤을 뒤엎으며

새들을 지저귀게 하는 아침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감자 깎던 실바는

한 쪽 구두만 신고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 분무기에 대한

무미건조한 소문으로 활기찬 식탁

 

어느 쪽 발이 의족인지 생각나지 않아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병에 걸리는 건 쉬운 일이니까

 

중요한 건 지금 지붕이 새고 있고

거기에 비가

돋보기를 들이대야 겨우 보일 것 같은

금단의 알을 낳고 있다는 것

 

부분적으로 달콤해지는, 기특한 상상으로

 

 


 

 

최호빈 시인 / 소송

 

 

 1

 베개에서 모래가 흘러나온 날

 한밤중의 침대는 컴컴하고 미끄러웠다

 잠을 깬 아담은 자신의 영혼을 고소했다

 

 2

 나는 한 번도 자른 적 없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에 가까웠고 검은 피부를 가졌다 아담과 닮지 않은 나를 스스로 이브라 불렀다 아담은 자신의 몸에서 벗어난 나를 자신의 영혼이라 생각했지만 우리는 한날한시에 같이 벌거벗고 있던 쌍둥이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오른손의 손금을, 나는 왼손의 손금을 향했다 내게 아담은 친아버지도 친아들도 아닐지 모른다 한번은 내가 가시에 찔린 손가락을 빨고 있을 때 아담은 방구석에서 자신의 영혼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3

 침대에 나란히 누운 아담이 뒤척인다 누워있는 폼이 달라서 우린 서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무관심을 겨냥하는 뒤통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고함

 

 상상력이 풍부한 정적이 내게 말했다

 

 난 너가 싫어

 

 이런 식으로 아담은 남들이 보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경멸이 뒤섞인 감정으로 매일 밤 나를 칠했다

 

 4

 유체이탈 후

 아담은 눈동자에 주삿바늘을 찔러서

 속이 비칠 때까지 검은자위를 뽑아냈다

 바깥이 참견한다고

 타인의 영혼이 떠올랐다고 믿고 있었다

 

 5

 아담이 실종된 것이 분명하다 관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걷던 아담의 불면은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입에서 노래가 제자리를 찾은 것도 잠시, 내겐 그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없었다 몸을 탐하긴 했어도 아담의 것은 아니었는데…… 여러 생각이 미끄러져 나오도록 나는 끝까지 가만히 있었지만 생각에 덮인 천은 쉽게 들춰지지 않았다 결국 불길한 생각이 차려진

 

 식탁을 엎었다

 

 


 

최호빈 시인

1979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