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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서봉 시인 / 플라시보 당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천서봉 시인 / 플라시보 당신​

 갈 곳 없어 나의 마당은 오늘 더 넓어집니다 색색의 꽃을 틔우느라 늙은 나무는 조금 더 얇아져갑니다

 하양이나 분홍을 골라 땁니다 거긴 희미한 부끄러움들이 스며있고 꼭 그만큼의 저녁이 나의 목숨입니다

 어제는 달항아리를 굽느라 세계를 잊었지만 벌겋게 점안된 나의 얼굴이 당신에 대한 낡은 기색입니다

 몇 권의 책을 펼치고 몇 년의 세월이 닫히는 동안 내가 만든 바람은 단 한 번도 객관적이지 못했습니다

 몇 개의 알약을 챙기다가 이젠 쓸모없는 파라핀종이로 피리를 불어 봅니다 낮달이 공명으로 연대합니다

 잘 지냅니다 덕분에 일요일은 조금 기괴하고 빨래 위로 떠나가는 철새를 향해 하시시 웃어보였습니다

 吉人이라도 기다리는 척, 담장에 그려지는 긴 목이라도 괜찮으니까, 당신 옆에 노을을 남겨두겠습니다

계간 『POSITION』 2022년 겨울호 발표

 


 

 

천서봉 시인 / 관상어 가게를 지나는 산책과 검열

​​

 밤은 입을 벌려 무언가 종용한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낮에 만난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다

 

 주변을 배회하는 것들을 먹어치우고 입은 또 입을 만들어낸다

파릇하게 신호가 바뀐다

 

 생각은 왜 아무렇게나 길을 건너가나 지느러미를 옮기며

유유히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신을 데려다가 기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가령 행복의 종말까지 함께 걸어가 보는 일

 

 미끄러운 입을 붙잡아 한데 꿰어두고 더 이상은

고독이 자라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일

 

 늘 젖어서 젖을 일 없는 길이 시드니까 관념어들은

작은 기척에도 벌레처럼 모여든다

 

 밤의 입김이 피어오르고 그 캄캄한 입은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랑에 대해 묻는다

 

 만질 수 없는 산책길에서 낮에 만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사라진다

​​

계간 『POSITION』 2022년 겨울호 발표

 

 


 

천서봉(千瑞鳳)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2005년 《작가세계》를 통해 〈바람의 목회〉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서봉氏의 가방』(문학동네, 2011)과 포토에세이 『있는 힘껏, 당신』(호미, 2014)가 있음. 2008년 문예진흥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