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서봉 시인 / 플라시보 당신 갈 곳 없어 나의 마당은 오늘 더 넓어집니다 색색의 꽃을 틔우느라 늙은 나무는 조금 더 얇아져갑니다 하양이나 분홍을 골라 땁니다 거긴 희미한 부끄러움들이 스며있고 꼭 그만큼의 저녁이 나의 목숨입니다 어제는 달항아리를 굽느라 세계를 잊었지만 벌겋게 점안된 나의 얼굴이 당신에 대한 낡은 기색입니다 몇 권의 책을 펼치고 몇 년의 세월이 닫히는 동안 내가 만든 바람은 단 한 번도 객관적이지 못했습니다 몇 개의 알약을 챙기다가 이젠 쓸모없는 파라핀종이로 피리를 불어 봅니다 낮달이 공명으로 연대합니다 잘 지냅니다 덕분에 일요일은 조금 기괴하고 빨래 위로 떠나가는 철새를 향해 하시시 웃어보였습니다 吉人이라도 기다리는 척, 담장에 그려지는 긴 목이라도 괜찮으니까, 당신 옆에 노을을 남겨두겠습니다 계간 『POSITION』 2022년 겨울호 발표
천서봉 시인 / 관상어 가게를 지나는 산책과 검열 밤은 입을 벌려 무언가 종용한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낮에 만난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다
주변을 배회하는 것들을 먹어치우고 입은 또 입을 만들어낸다 파릇하게 신호가 바뀐다
생각은 왜 아무렇게나 길을 건너가나 지느러미를 옮기며 유유히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신을 데려다가 기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가령 행복의 종말까지 함께 걸어가 보는 일
미끄러운 입을 붙잡아 한데 꿰어두고 더 이상은 고독이 자라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일
늘 젖어서 젖을 일 없는 길이 시드니까 관념어들은 작은 기척에도 벌레처럼 모여든다
밤의 입김이 피어오르고 그 캄캄한 입은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랑에 대해 묻는다
만질 수 없는 산책길에서 낮에 만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사라진다 계간 『POSITION』 2022년 겨울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진형 시인(경주) / 풍차 외 4편 (0) | 2023.03.28 |
---|---|
이규리 시인 / 저, 저 하는 사이에 외 1편 (0) | 2023.03.28 |
최호빈 시인 / 투석기(投石紀)의 성 외 2편 (0) | 2023.03.27 |
황정현 시인 / 청동겨울 외 1편 (0) | 2023.03.27 |
양현주 시인 / 나무에게 외 1편 (0)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