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저, 저 하는 사이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이규리 시인 / 저, 저 하는 사이에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이규리 시인 / 레고나라에서 우리

 

 

식상하게 이유를 길게 말 할 필요가 없어요

대신

레고 블록을 주세요

 

레고나라에도 이합집산이 있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일찍 철이 드는지

빨강과 파랑을 달리 끼워도

살짝 돌아보고 웃음 지을 뿐이에요

앞바퀴와 뒤 바퀴를 바꾸면 조금 투덜거리지만 이내

굴러 가고 있으니까요

 

리 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바꾸어 사용하더라도 이유를 모르지는 마세요

이유를 말하지 않더라도 늦지는 마세요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야 하니까요

 

블록과 블록, 새와 구름

화면과 화면을 터치 터치

상상을 끼우고 빼고 조립하며서

 

어느 별은 태어나고 어느 별은 추락해도 끄떡없어요

 

이별도 다시 끼우면 되니까요

빨강은 다 타버린단 말이야 파랑을 줘 그런 동안

 

꿈이 착착 도착 중이랍니다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과 『뒷모습』, 『당신은 첫눈입니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등과 산문집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가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