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형 시인(경주) / 풍차
내게 말해줘 바람을 빌려서라도 해풍에 맞서 돌고 도는 날개는 절벽에 붙어 떨어지지 못하는 목숨 지워지지 않는 황홀한 공중제비 한평생에 걸쳐 볼 수도 없는 너의 극지는 어디일까 비상할 듯 비상하지 못하는 묶인 설움 따위는 잊어야지 바닷가 언덕에 펄럭이는 깃발은 멀미를 모르고 동백꽃 떨어질 때 파도 소리 퍼져가는 화음만이 귀청을 간질이지 아프지 않고 돌아가는 날개는 없으니 사방에서 팔이 자란 바람에 맞서 버티는 힘 해안도로가 창백하게 뻗어가는 곳 다시 온다는 약속은 수평의 감정에서 깨질 때 돌아가다 멈추는 너의 여정은 바람결에 몸을 떤다 내달리지 못하면 따라잡을 수 없어 빠져나가기만 하는 바람의 파상공세를 어쩌랴 길 잃은 풍속은 펼치면 이별이 도사릴까 풍속을 탓하지 말아야지 떠 가는 배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가고 창공에 푸르게 찍혀 선회하는 독수리는 새로운 먹이를 노리는데 나는 굳은 혀로 말할 수 있는 단 한 마디 찾지 못하지 바람의 언덕에서 너의 소실점은 언제나 빛의 속도로 달리지
박진형 시인(경주) / 소설 읽는 여인
내가 당신을 먼저 읽은 건가요?
당신을 읽을 때 당신은 먼 나라의 공주로 나타나요 당신의 목소리에 젖어 들고 싶어요
당신을 읽어보아요 왕자와 공주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끝나는 동화의 마지막 장을 만들어주세요
내가 당신을 읽을 때, 다른 백조는 보이지 않아요
당신을 읽어보아요 낮에 뜬 반달이거나 밤에 지는 별이거나 변함없이 내 심장에 뿌리를 박아요 몸은 야위어지는데 어두운 방은 서서히 밝아와요
내가 당신을 읽을 때 모래시계는 멈추어 버려요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어둡기만 한 도시에서 서로의 몸에 스며들 때 우리는 함께 탈출을 꿈꾸죠
내가 당신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이 나를 먼저 읽은 건가요?
* 소설 읽는 여인 : 반 고흐의 그림에서
박진형 시인(경주) / 시 맛있게 먹는 일곱 가지 방법론
명사가 끓으면 관형사부터 넣으세요
관형사를 드시고 나서 형용사를 넣으세요 감탄사는 살짝살짝 익혀 드세요 감탄사를 드시면서 수사도 곁들이세요 3분의 2가량 수사를 드신 뒤 동사를 넣으세요 동사를 드시고 1 국자 정도 명사를 남긴 뒤 시를 볶으세요 시를 드시면서 남은 형용사를 곁들이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시 맛있게 드신 당신에게 행복한 눈물*을 디저트로 드립니다
박진형 시인(경주) / 쇠북 같은
한 오백년쯤 삭은 쇠북 같은
벼린 비수날로 푹, 그은 터진 옆구리 다시 꿰맨
맨주먹으로 퉁, 친
古梅 울림판 끝에,
깊고 그윽하게 불려나와 앉은
언어의 붉은 언어의 수천 나비떼, 떼
박진형 시인(경주) / 갯벌 부처
갯벌은 무량수 중생 다 먹여 살리니
세 치 혀가 아닌 오체투지로 기어가는 갯지렁이야
온몸 내맡겨 흔들리는 퉁퉁마디야
一步一拜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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