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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우 시인 / 귀는 눈을 감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김은우 시인 / 귀는 눈을 감았다

 

귀가 무럭무럭 자랐다

햇살 쪽으로 자라는

귀는 환한 봄날 더욱 빛났다

비 오고 바람이 불면

빗소리와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흥을 더해주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오자

귀는 살이 오르고

해바라기를 닮아 노랗게 익은

주근깨 가득한 야윈 얼굴을 덮었다

기대와 실망이 거듭되는

휘청거리는 하루 또 하루

너무 많은 소리를 들은

귀는 점점 말라갔다

패배한 자의 행색으로

얼굴에서 떨어져

가로수 사이를 나뒹굴었다

찬바람이 말라비틀어진

그를 끌고 다녔다

갈 곳 없는 새들이

뒤를 오종종 따라다녔다

고양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은 많았지만

구경꾼은 많지 않았다

귀는 마른 가지를 붙들고

건초처럼 말라갔다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에서

 

 


 

 

김은우 시인 / 불법체류

 

길고양이는 엄마가 없고

주소가 없고 모국어도 없지

맨발로 달리다 지치면

아무 데나 고개를 묻고 잠드는

난간을 오르내리며

굴러 떨어지는 그림자

시린 등을 기대고 싶은

눈알이 왈칵 붉어지는 저녁

호루라기 소리 고함 소리에

어깨를 흠칫 움츠리며

전봇대 뒤에도 숨고

벤치 아래에도 숨지

옆구리가 허전하고

배가 고픈 밤

지나온 기억을 지우며

기어오르는 담벼락

머리 위로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에

온몸이 다 젖지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에서

 

 


 

김은우 시인

광주에서 출생. 1999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도서관』과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 『귀는 눈을 감았다』가 있음. 2015년 전남문화예술재단기금 수혜. 2016년에는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2020년에는 전남문화관광재단기금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