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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순영 시인 / 수국의 비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홍순영 시인 / 수국의 비애

 

 

몇 해째 나는 얼굴을 갖지 못했다

주인의 손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새파란 입술을 만들어 내밀었지만

그것만으로 나머지 생을 보장받는 건 아니어서 늘 조마조마했다

 

꽃 피우지 못하는 삶이란

무겁게 깔린 혼잣말로 발들을 덮는 밤의 연속

 

옆의 수국이 한 계절에도 몇 개의 얼굴을 매다는 동안

나를 묶어 놓은 초록의 집착은 세 해째 불임을 낳았다

면목 없는 계절의 이 숨 막히는 건조함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의 원인을 찾는 일에 골몰하는 한낮

흙의 내력을 의심하고, 부실한 뿌리와 변덕스런 일기를 의심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절차에 불과하다는 걸

꽃 없는 계절을 견뎌온 내성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시인할 밖에

새벽을 닮은 얼굴로 누군가에게 말 걸고 싶다

아, 누가 내게 얼굴을 달아준다면

세상은 얼굴 없이 살아가기엔 너무 긴 터널

수많은 얼굴을 가진 그대

내게 얼굴 하나만 빌려다오

 

 


 

 

홍순영 시인 / 사과는 사과가 아니고, 창문은 창문이 아니어서

 

 

낯익은 목소리가 매달린 창문이 열린다

사과 속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빗방울이 들이치자 달콤하고 우울한 즙이 만들어진다

사과 속에는 자라다 만 이빨 자국이 있고

새의 울음이 새도 모르게 저장된다

새는 어떤 이유로든 죽어가고 있으므로

노래는 아름답지만, 사과는 안에서부터 부패한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가슴

양쪽의 무게를 알 수 없다는 것이 함정

사과는 자신의 한쪽 가슴을 창밖으로 내어놓는다

빛에 내어준 넓이와 깊이만큼 가슴이 익는다

무르익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일까

닫혀있는 반쪽 가슴이 조금 더 어두워진다

창문은 죽지 않고 낡아갈 뿐이어서

창문 틀에는 늘 벌레가 꼬이고

거미줄은 사과 배꼽에서 자란다

창문을 닫는 것은 그 누구의 의무도 아니어서

사과는 밤새 혼자 앓는 소리를 낸다

창문의 역할이란 빛과 어둠을 편식하지 않는 것

착한 식습관이 얼룩진 사과의 얼굴을 만든다

열린 창문은 권태로운 사과의 날개가 되고

사과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허공 속에서 사과는 점점 팽창하고 창밖은 모두 사과가 된다

사과 속에서 창문이 닫힌다

안쪽을 기웃거리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달라붙은 창문은

사과를 키우던 기억과 목소리를 잃고 잠이 든다

비대해진 사과 속에서 자라다 만 이빨이 한꺼번에 쑤욱 솟는다

 

<시와경계> 2018년 가을호

 

 


 

홍순영 시인

인천에서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2011년 《시인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이 있음. 제13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