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옥 시인 / 석류 도마가 흥건하다 그 흥건함이 두 손 가득 물들어온다 이 아침을 붉은 개구리라 하자 알밴 개구리 알들이 쏟아진다 목숨이란 것이 이리도 시큼했었나 아삭 씹힌다 톡톡 입안에서 터진다 뛰어난 칼잡이는 칼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데 주방이 칼날이 상처로 가득하다 붉음이 온몸으로 번진다 곧 붉은 알들을 낳겠다 피범벅 된 아침을 씹어 삼킨다 알들이 입안에 가득하다 아침노을을 붉은 알들이라 하자 곧 올챙이를 낳겠다 칼을 씻는다 도마를 씻어내며 또 다른 아침이 붉어 오는 것을 바라본다 내일도 수많은 아침이 톡톡 터지겠다 시집 『안개의 저쪽』 (천년의시작, 2022) 수록
김은옥 시인 / 그림을 망치다
담묵에서 농묵으로 강렬하고도 차분하게 처리된 수묵화 네가 남긴 산사 같던 적요 기울어가는 저녁 그림자 너는 원근이 구분되지 않는 흐린 먹물로 거기 서 있다 정좌한 기와집들이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골목 절묘하게 마무리해놓은 농담 기법, 눈 내린 뒤 쇠종 속에 갇힌 물고기 울음소리처럼 붓끝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동네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 켤 때 세필로 뻗어가는 골목을 따라 점 하나 찍는다 너의 형상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그 점 속으로 들어가 한 점 농묵으로 섞여 번져간다 문득 목탁 소리처럼 다시 눈은 내리고
먹물 한 점이 그림 전체를 먹어 들어간다 시집 『안개의 저쪽』 (천년의시작,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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