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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옥 시인 / 석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김은옥 시인 / 석류

도마가 흥건하다

그 흥건함이 두 손 가득 물들어온다

이 아침을 붉은 개구리라 하자

알밴 개구리

알들이 쏟아진다

목숨이란 것이

이리도 시큼했었나

아삭 씹힌다

톡톡 입안에서 터진다

뛰어난 칼잡이는 칼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데

주방이 칼날이 상처로 가득하다

붉음이 온몸으로 번진다

곧 붉은 알들을 낳겠다

피범벅 된 아침을 씹어 삼킨다

알들이 입안에 가득하다

아침노을을 붉은 알들이라 하자

곧 올챙이를 낳겠다

칼을 씻는다

도마를 씻어내며

또 다른 아침이 붉어 오는 것을 바라본다

내일도 수많은 아침이 톡톡 터지겠다

시집 『안개의 저쪽』 (천년의시작, 2022) 수록

 


 

 

김은옥 시인 / 그림을 망치다

 

담묵에서 농묵으로 강렬하고도 차분하게 처리된 수묵화

네가 남긴 산사 같던 적요 기울어가는 저녁 그림자 너는 원근이 구분되지 않는

흐린 먹물로 거기 서 있다

정좌한 기와집들이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골목

절묘하게 마무리해놓은 농담 기법, 눈 내린 뒤 쇠종 속에 갇힌 물고기 울음소리처럼

붓끝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동네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 켤 때

세필로 뻗어가는 골목을 따라 점 하나 찍는다

너의 형상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그 점 속으로 들어가 한 점 농묵으로 섞여 번져간다

문득 목탁 소리처럼 다시 눈은 내리고

 

먹물 한 점이 그림 전체를

먹어 들어간다

시집 『안개의 저쪽』 (천년의시작, 2022) 수록

 

 


 

김은옥 시인

2015년《시와 문화》 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안개의 저쪽』 (천년의시작, 2022).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의. 우리시. 시산맥특별회원. 현대시학회. 청미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