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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현우 시인 / 나의 차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최현우 시인 / 나의 차례

난간을 의자로 삼던 시절

발을 딛고 앉은 자리마다

떨어지는

 

있지

 

옆 건물에 고양이들 살았다

신이 밑창을 찍어 놓은

단층 그 집,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볕에 등 굽던 세 마리

 

나는 봤다

 

고깃집이래

돼지의 살을 뜯고 뼈를 팔며

그 앞 골목 눈길 위로

하얗게 꺼진 숯과

불량한 살점을 모조리 감추던

 

고양이들 거기 사는데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지탱하고

없었던 듯 떠났다가

있었던 듯 돌아오는

 

거처를 지붕으로 고른 짐승

누가 줄 수 있는 천장 따윈 없겠지만

 

언제까지 살아야겠니

그러자, 저마다 대답한다

 

시간의 모든 소나기를 맞으라

얼룩일 뿐, 모든 것

기분의 혈흔을 혓바닥으로 문지르며

젊음 따위 끝없이 옅어질 때까지

외연에 뭉친 사람의 냄새를

전부 핥아 뱉을 때까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뛰어내릴 뻔했다

 

혹시나 싶어

조금 위로

올라가 보았다

 

여기보다 높은 곳에서

누군가 자꾸 발목을 흔들며

눈가가 그을린 채

나를 본다

 

 


 

 

최현우 시인 /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로*

​이곳엔 아무도 없다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

형벌을 나눠 가지는 일이라고 믿고 살았을 때

늦은 밤 돌아오는 이를 위해

식탁 위에 촛불을 밝혀두고

불편한 잠을 껴안았을 때

현관 여는 소리를 기다리던 이곳엔

비 이제 아무도 없다.

당신이 나의 죄는 아니었지만

당신을 생각하며 참회하던 날들

가두어 기도를 시키면

기억의 안에서 기억을 먹다가

모두 죽어버린 날들

나는 나를 길들이기 위해

심장을 낭비했고

아무도 없다

처음부터

당신은 당신이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니었다

열리지 않는 죄

모든 노래가 다 찬송가였다

*“Jedem das seine." 독일 부헨발트 나치 포로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중에서

 

 


 

최현우 시인

1989년 서울에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발레니나〉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