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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희연 시인 / 업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9.

안희연 시인 / 업힌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봤어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이대로 입이 지워져버렸으면, 싶다가도

무당벌레의 무늬는 탐이 나서

공중을 떠도는 먼지들의 저공비행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하루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화면 속 강아지는 여전히 죽은 척하고 있다

꼬리를 툭 건드려도 미동이 없다

미동, 그러니까 미동

불을 켜지 않은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애벌레처럼

그저 하루를 갉아 먹는 것이 최선인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는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애벌레는 무사히 무당벌레가 될 수 있을까

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예쁜 걸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책장 위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

나무를 깎아 만든 부엉이, 퀼트로 된 새 인형, 엽서 속 검은 고양이, 한 쌍의 천사 조각상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 있다

나는 자주 그게 끔찍해 보인다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인 / 떨기나무 아래

 

 

오늘은 제대로 흔들 거야. 발악하고 싶어.

 

늘 홀로 이곳을 찾아와

몸을 핥다 가는 개에게 말을 건다.

 

너도 필요하지? 숨어 있을 곳.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핑계 같은 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인간의 기척이 있다.

그늘을 독차지한 개를 보고

못난 것, 못난 것 하며 쏟아질 듯 달려온다.

 

할머니, 제가 보이세요?

오랜만에 본 인간이라 더 세게 흔들렸는데

 

여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구나.

할머니가 개를 안고 돌아간다.

풍향계는 여전히 멈춰 있다.

 

손끝이 탈 듯이 뜨겁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못난 것, 못난 것 두 번 말하고

품에 안아 돌아가는 집.

너구나, 너였구나.

저녁이 나를 찾아내주기를 기다려.

 

매 순간 불타고 있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네.

 

 


 

안희연(安姬燕) 시인

1986년 경기 성남에서 출생. 서울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졸업 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박사 수료.  2012년 《창작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있음. 2016년 신동엽문학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