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호 시인 / 우리들의 연혁(沿革)
밤 유리창에 한 마리 나방이가 퍼득입니다. 등 뒤 어둠 속에는 그가 헤매어 온 길들이 흐느끼고 바람은 그 길을 따라 나뭇잎 흔들며 제 영혼의 힘을 비춰봅니다. 오오 흘러가는 것들은 아름답지만 흐를 수 없는 분열의 어리석음이 불빛을 부릅니다. 미지를 향한 머리맡엔 투명한 절망이 이리 단단하고 온 밤의 이마를 적시는 그리움의 피. 막막한 심연 위로 떠오르는 아득히 오래된 눈물이 하나 중천에 별이 되어 굽어봅니다.
손종호 시인 / 양쯔강
흐린 놈들아 흐려서 더는 나아갈 수 없어 강물로 누운 놈들아 태초에 우리는 맑은 이슬이었거니 풀잎위로 퉁기는 비파소리였거니 막막한 가슴으로 이마 푸른 구름으로 떠돌다가 어두운 시대 밝게 잠 못드는 시인의 처마를 소낙비 되어 내렸거니 광활한 대륙의 가슴팍을 오래 오래 적셨거니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놈들아 잠 속의 잠에 갇혀 강물로 누운 놈들아 소용돌이치는 건 죽은 피 아우성치는 건 회한뿐일 지라도 상처 속의 상처 절망 속의 절망의 한 뿌리라도 적시고 데불어 그 늠름한 혼돈으로 뻗쳐 마침내는 끝간 새벽바다에 닿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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