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시인 / 직소폭포
산다는 게 무심히 걷다가도 문득 시퍼런 낮달을 만나기도 하는 것인가
잔잔히 흐르던 그대 마음이 문득 흐르다 멈추어 허공에 하얗게 걸려 있구나
-시집, 『슬픔의 힘』, 문학동네, 2000
김진경 시인 / 빈집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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