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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용기 시인 / 경칩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9.

정용기 시인 / 경칩

출구는 어디쯤입니까.

풍문으로는 겨울이 끝나간다는데,

봄을 맞이해야 하는데, 겨울잠이 너무 깊었나요.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행복도시 2-4 생활권

새로 지은 육중한 빌딩에 짓눌려

욱신거리는 뒷다리 가다듬을 수조차 없습니다.

잘 다져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가로막혀

숨은 턱턱 막히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습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알주머니를 어디에다 쏟아야 합니까.

고층아파트 층층마다 환하게 밝힌 불빛에

알주머니의 눈알들이 분주해지는데

봄밤의 환희를 이제 어디서 수소문해야 합니까.

 

관공서와 고층아파트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새로 개업한 뼈해장국집에서

흐물흐물해진 내 등뼈를 발라내고 있습니까.

갈지자걸음의 취객이 내 등에 토악질을 하고 있습니까.

새로 생긴 영화관에서는 누대로 짊어지고 온

난생으로 이어온 우리 종족의 비애를 펼쳐 보입니까.

대대로 쟁기 끌고 써레질하던 들판을 뺏기고

우리는 철거민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까.

 

관수용 점적 물주머니를 매달고

옮겨 심은 느티나무가 시름시름 죽어가는 C블록

흙을 쏟아 부으려고 거대한 덤프트럭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굴삭기가 내 몸을 반 토막 내려고 덜컹거리고 있습니다.

언제쯤 출구를 찾을 수 있습니까.

언제쯤 겨울잠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까.

땅속에 묻힌 하수 배관으로 흐르는 물소리나 들으면서

백년을 기다리면 될까요, 천년을 버티면 될까요.

​​

​-시집 『주점 타클라마칸』(걷는사람, 2022년) 수록

 

 


 

 

정용기 시인 / 크라슐라오바타CrassulaOvata*

 

 

나의 서식지는 11층 벼랑, 천길 낭떠러지

통유리에 갇힌 거리에는 파도가 몰아쳐요

물보라 너머로 은행과 버스정류장이 일렁거릴 때

잠시 물멀미를 앓기도 하지요, 그래도

쾌청한 오전은 햇빛을 골똘하게 긁어모아

은행에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요, 그러면

공항이나 항구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지 몰라요

앞 건물이 햇빛을 가리는 오후가 되면

내 몸을 통통하게 불리는 것이 물인지 불인지,

희망인지 절망인지 종잡을 수 없더라도

스스로 몸피를, 키를 재어 보기도 하지요

 

내가 사는 곳은 우두커니와 물끄러미 사이

목질의 기다림과 다육질의 그리움 사이

해 지고, 긴 밤 홀로 우두커니 견디는

가로등과 남몰래 외로움을 나눠 가져요

풍랑이 잦아든 길모퉁이 꽃집의 뿌리 잘린 꽃들이

이종교배를 꿈꾸며 밤새 발바닥을 간질일 때

물 냄새에 몸이 달아오르곤 하지요

수평선 너머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금씩조금씩 발돋움을 하지요

*건조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줄기와 잎 그리고 뿌리에 많은 양의 수분을 저장할 수 있는 다육식물의 한 종류로 원산지는 남아프리카이며, 흔히 ‘염좌’ 혹은 ‘염자’로 불림

​​

​시집『주점 타클라마칸』(걷는사람, 2022년) 수록​

 

 


 

 

2001년≪심상≫신인상 등단시

 

정용기 시인 / 샌프란시스코

―머리에 꽃을 꽂으십시오*

 

당신이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가신다면

그때 나는 제대 말년, 육군 보병 병장

꽃들과는 내연의 관계였네

내 안에서 사태나던 무수한 꽃들

그래도 주체할 수 없던 개나리꽃은 철모에 꽂고

행군길에 나섰네

알맹이 빼어버린 방독면 주머니에

소형 라디오 몰래 감추고서는

얼굴도 모르는 외국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었네

어디쯤 있는지 몰라도 노란 꽃의 나라에 닿고 싶었네

그 봄 행군길은 눈물겨웠네

 

속절없이 스쳐가는 세월의 물살

우두망찰 바라만 보다가 어느새 가을

굳은살 오른 발바닥으로는 짚이지 않던 길들이

노래 한 자락 제대로 들여놓을 수 없는 마음속에

숨어 있기라도 할까

빈배만 남아 흔들리는 나루터에서

한 줄로 늘어선 나무들 곁에 앉는다

우주와 내통하는 저 들뜬 열망들을

물 속에 부려 놓고 다스리는 나무들

폭설이 내려서 모든 길이 사라져 버리는 날은

안테나를 뻗어 먼 하늘로 편지를 쓰겠지

흘러가는 강물 내 안으로 끌어들여

나무들의 열망을 품어 보리라

속살 깊이 오래 감춰둔 햇살과 바람에 몸 섞으면

내 안에서 나무들 온통 꽃무더기로 일어서겠지

그래그래 샌프란시스코는 잊을 수 없지

내 마음 속 사막의 오아시스지

늦가을 다시 듣고 싶은 샌프란시스코

 

*Scott Mckenzie가 부른 ‘San Fransisco'의 시작 부분

 


정용기 시인 / 분갈이

 

 

1

가구가 늘어날수록 마음은 비좁아진다

바깥에서 묻혀 온 먼지들은

햇빛도 안 닿고 통풍도 안 되는

가구 뒤편 어둠 속에서 곰팡이가 되어

마음속까지 포자를 번식시킨다

잠 속에서도 길이 툭툭 끊어진다

 

2

퇴근 후 나를 숨기고 있던 먼지 묻은 옷을 벗으면

정전기가 탁탁 전보를 친다

팔 뻗은 안테나들이 가리키는 쪽

붐비는 별자리들의 회로를 타고 왔을까

별들의 추파로 마음이 따끔거린다

 

3

이제는 많이 스러져 버린,

신혼으로 설레던 그릇과 수저들의 빛깔은

세월의 밑바닥에서

결 고운 추억의 지층이 되어

내 발바닥을 데우고 있으리라

겨우내 실내에서

건조한 내 삶의 무늬를 지켜보던 화초들

분갈이를 해야지

뿌리들이 화분 밑바닥을

서너 바퀴는 돌았을 터인데,

꽃대의 기척이

내 비좁은 마음까지 간지럽혀 오는데


 

정용기 시인 / 나무의 노래

─思母曲․3

 

 

전라도 담양 어딘가에서 왔었다고 했지요

행상 아주머니들

가을도 끝나갈 즈음 굴렁쇠 굴리던 텅빈 들판길로

가득하게 이고 오던 竹細品 너머 해가 저물어

갈 곳 없는 그네들 끌어다가

쌀 안치고 군불 지펴 서산 하늘을 달구던 어머니

무수한 광년을 달려온 별빛 아래서

보리가 파릇파릇 싹을 틔울 것도 같은 밤

어머니와 그네들 이야기 소리가

댓잎 위에 되비치는 달빛이 되어

몽롱한 내 잠 속으로 쏟아지고

어머니가 둥글게 말아 놓은 세상을

희미한 꿈결 위에서 굴렁쇠로 굴리고 다녔습니다

 

세상이 참 둥글기도 하다고

뒷산의 나무들은 품속 깊숙히

겨울잠 채비하는 벌레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바람의 채찍을 노래로 바꾸어

벌레들이 슬어 놓은 알을 도담도담 키우며······

얼마나 자랐을까 걷어찬 이불 여며 주며

벌레의 집을 더듬어 보던 어머니 손길에는

나무를 스치고 가는 깊은 밤바람 소리

내 이마에 풍성하게 쌓이곤 했습니다


 

정용기 시인 / 집은 어디

 

 

눈 내리는 늦은 밤길에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한다

사람들은 모두 보통명사로 증발했나 보다

둥글게 불 밝히고 일렬로 선 가로등이

신호음 속으로 한 점씩 멀어진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 ····길이 헝클어진다

잠시 후 삐 소리가 나면

· · ····고향 가는 막차는 떠났을까

용건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세상이 눈발 속에 잠긴다

 

노란 불빛 흘러나오는 집을 지나치다가

벙어리장갑 속의 손가락 같은

그집 식구들의 꽃 핀 그림자 위로

무수한 나비떼가 날아들어

불현듯 환한 잠이 쏟아진다

 

느낌표로 발자국 남기며 가야 할

집은 어디

2001년≪심상≫신인상 등단시

 

 


 

정용기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01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하현달을 보다』 『도화역과 도원역 사이』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 답사』(창비, 공저). 2001년 웅진문학상 수상. 2003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현재 〈화요문학〉동인. 충남작가회의, 충남시인협회, 세종문학, 세종시마루 회원. 공주금성여고 교사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