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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진형 시인(경주) / 풍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8.

박진형 시인(경주) / 풍차

 

 

내게 말해줘 바람을 빌려서라도

해풍에 맞서 돌고 도는 날개는

절벽에 붙어 떨어지지 못하는 목숨

지워지지 않는 황홀한 공중제비

한평생에 걸쳐 볼 수도 없는 너의 극지는 어디일까

비상할 듯 비상하지 못하는 묶인 설움 따위는 잊어야지

바닷가 언덕에 펄럭이는 깃발은 멀미를 모르고

동백꽃 떨어질 때 파도 소리

퍼져가는 화음만이 귀청을 간질이지

아프지 않고 돌아가는 날개는 없으니 사방에서 팔이 자란

바람에 맞서 버티는 힘

해안도로가 창백하게 뻗어가는 곳

다시 온다는 약속은 수평의 감정에서 깨질 때

돌아가다 멈추는 너의 여정은 바람결에 몸을 떤다

내달리지 못하면 따라잡을 수 없어

빠져나가기만 하는 바람의 파상공세를 어쩌랴

길 잃은 풍속은 펼치면 이별이 도사릴까

풍속을 탓하지 말아야지

떠 가는 배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가고

창공에 푸르게 찍혀 선회하는 독수리는 새로운 먹이를 노리는데

나는 굳은 혀로 말할 수 있는 단 한 마디 찾지 못하지

바람의 언덕에서 너의 소실점은 언제나 빛의 속도로 달리지

 

 


 

 

박진형 시인(경주) / 소설 읽는 여인

 

 

내가 당신을 먼저 읽은 건가요?

 

당신을 읽을 때 당신은 먼 나라의 공주로 나타나요 당신의 목소리에 젖어 들고 싶어요

 

당신을 읽어보아요 왕자와 공주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끝나는 동화의 마지막 장을 만들어주세요

 

내가 당신을 읽을 때, 다른 백조는 보이지 않아요

 

당신을 읽어보아요 낮에 뜬 반달이거나 밤에 지는 별이거나 변함없이 내 심장에 뿌리를 박아요

몸은 야위어지는데 어두운 방은 서서히 밝아와요

 

내가 당신을 읽을 때 모래시계는 멈추어 버려요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어둡기만 한 도시에서 서로의 몸에 스며들 때 우리는 함께 탈출을 꿈꾸죠

 

내가 당신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이 나를 먼저 읽은 건가요?

 

* 소설 읽는 여인 : 반 고흐의 그림에서

 

 


 

 

박진형 시인(경주) / 시 맛있게 먹는 일곱 가지 방법론

 

 

명사가 끓으면 관형사부터 넣으세요

 

관형사를 드시고 나서 형용사를 넣으세요

감탄사는 살짝살짝 익혀 드세요

감탄사를 드시면서 수사도 곁들이세요

3분의 2가량 수사를 드신 뒤 동사를 넣으세요

동사를 드시고 1 국자 정도 명사를 남긴 뒤 시를 볶으세요

시를 드시면서 남은 형용사를 곁들이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시 맛있게 드신

당신에게 행복한 눈물*을

디저트로 드립니다

 

 


 

 

박진형 시인(경주) / 쇠북 같은

 

 

한 오백년쯤 삭은

쇠북 같은

 

벼린 비수날로 푹, 그은

터진 옆구리 다시 꿰맨

 

맨주먹으로 퉁, 친

 

古梅 울림판

끝에,

 

깊고 그윽하게 불려나와 앉은

 

언어의 붉은 언어의

수천 나비떼, 떼

 

 


 

 

박진형 시인(경주) / 갯벌 부처

 

 

갯벌은 무량수 중생

다 먹여 살리니

 

세 치 혀가 아닌

오체투지로 기어가는

갯지렁이야

 

온몸 내맡겨 흔들리는

퉁퉁마디야

 

一步一拜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박진형 시인(경주)

1954년 경북 경주 출생. 198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몸나무의 추억』, 『풀밭의 담론』, 『너를 숨쉬다』, 『퍼포먼스』, 『풀등』, 『고마 됐다』 등. 만인기획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