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현 시인 / 청동겨울 녹는 거 틀림없나요
함께 죽어간다는 거요
잔무늬 거울도 세발까마귀의 울음도 거푸집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는 거요 불과 볕이 까닭이라면
안짱다리 언니들은 유별나지요 달처럼도 나처럼도 기울지 않아요 어떻게든 우아해지니까요
웃을지 모르겠지만 비극에 대해서 청년들은 정직하다는 거
손님을 들이고 싶은데 문을 닫아요 구경은 미뤘어요 표정도 떼어먹어요 청혼은 언제 하나요 외롭지만 혼자가 아니라서요
어서 와요 문을 열면
반달돌칼을 쥐고 싶을지 몰라 어쩐지 손아귀가 씩씩해질 것 같아서
할머니들이 조금 가엾기도 하지만 엄마들이 졸고 있으니까
오늘 밤 나의 동사들은 누울 때도 설 때도 침을 다시는데
까막까치들이 밤하늘을 수놓을까요 눈보라를 몰고 오네요 사방에 펼쳐진 겨울이 녹스나 봐요 쇳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계간 『시와 사람』 2022년 겨울호 발표
황정현 시인 / 핑고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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