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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강하 시인 / 텍사스 가방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이강하 시인 / 텍사스 가방

 

 

택사스 가방을 멘 소년이

스삭스삭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택사스에서 데리고 온

하얀 강아지도 스삭스삭

텍사스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우리는 그의 든든한 백이다

코코, 잘 따라오네? 제발 한눈 팔지 마

출근 전 전단지를 다 돌려야겠어

스삭스삭 점퍼 소리가 요란하다

깨진 화분, 오래된 계단, 검은 유리창이

가방을 통과해도 기분은 괜찮다

그런데 갑자기 골목을 돌아나간 강아지

꼬리 숙이고 멍멍 짖는다

모자 쓴 그림자들이 두려웠던 것일까

주유소 총소리가 기억난 것일까

강아지가 계속 짖는데도소년에게 말을 거는 그림자

아! 지겨워라 그림자들은 나쁜 사람

화상자국이 짙었다

부르주아 얼굴이었다 스삭스삭

소년은 모른 척 결빙 구간을 짓밟았다

다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텍사스 가방도 모른 척 속도를 냈다

 

발소리는 높은 계단으로

그림자들은 찢어져 물이 되었다

 

―계간《시에 》2020년 여름호

 

 


 

 

이강하 시인 / 벚나무

 

 

오늘도 나는 자유가 없다

 

절망이 탈출하는 공명줄같이

 

눈부신 어제가 찍어낸 출렁다리같이

 

갓 핀 잎들에 갇혀 파랑의 파란에 질려 있다

―계간《시에 》2020년 여름호

 

 


 

 

이강하 시인 / 오래된 나무 이야기 3

 

 

 어린잎이 싱글벙글 피어나고 있었다. 사월의 언덕에서. 오! 예쁘구나, 부럽구나, 라는 말이 할머니 입에서 툭 튀어나와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나도 갓 핀 감잎처럼 손가락을 쫙 펼치고 가장 오래된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예쁘다, 라는 말보다는 부럽다, 라는 말에 더 깊어지는 생각. 감나무 수피 여기저기서 붉은 촉을 발견하고는 부럽다, 라는 말이 계속 튀어나왔다. 죽은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바람 무덤이 파도처럼 흩어졌다. 진정 올해의 우리는 부럽기만 하고 아프지 않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지구의 환경을 위해 계속 봉사를 할 수 있을까. 그럼, 늦지 않았지. 움직인다는 것은 기회지. 손가락 사이 혈은 잘 돌고 있잖아. 그렇다면 여름이 오기 전 우리 발가락들도 분발해야 할까. 더 열심히 노력하면 막힌 혈을 뚫을 수 있을까.

 

 


 

 

이강하 시인 / 오래된 나무 이야기 4

 

 

 회화나무 사이로 반달이 떴다

 벗의 어제가 떴다

 회화나무도 반달도 나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벗들과 외암 민속마을로 여행 갔던 때가 생각난다 고택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생각난다 모란 동백 노래를 부르며 돌담길 걸어 나가던 공책과 연필의 찰나도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들은 타래난초 같았지 제각각의 뿌리가 그리워 고향 닮은 마음을 선택했을까 너의 사랑은 섬진강 줄기보다 길고 파릇했지 백 년도 더 넘게 살 것처럼 웃음소리도 호탕했지 나의 사랑도 마을 곳곳을 돌다가 고택의 세계로 빠져들었지 달빛 흐르는 밤, 걸음걸이는 누가 제일 예뻤더라? 달리기는 누가 잘했더라? 오징어게임에서 승리한 벗은 누구였더라? 공책과 연필이 잠들기 전 오이 마사지는 누가 해줬더라?

 

 이제 나는 너를 만질 수 없고 너도 나를 볼 수 없는가

 회화나무 사이로 반달이 네 마음을 내보낸다

 반짝거리는 별모양으로

 백 년의 반을 살다 가겠다는 네가 미워서 나는 운다

 가슴 움켜쥐고 자꾸 운다

 회화나무가 반달을 돌리고 있는 밤

 

변방 37집 『액체사회』2022년 푸른사상사

 

 


 

이강하 시인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10년 《시와 세계》 하반기 신인상 詩부문에 〈숯가마〉 외 3편의 詩가 당선. 시집으로 『화몽(花夢)』 『붉은 첼로』 『파랑의 파란』 등이 있음.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