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인 / 둥지새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정끝별 시인 / 은는이가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정끝별 시인 / 사랑의 병법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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