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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무서운 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최문자 시인 / 무서운 봄

 

 

무섭게 봄이 오고 있네

봄밤은 숨차고

자꾸 간지러운 지느러미가 새로 생기네

내 마음

너무 많은 기둥을 세웠네

단추 풀고 홑치마 훌렁 들추고

출렁출렁 달려드는 봄을

마구 비틀거리며 쫓아버렸네

그토록 굵은 기둥을 세우고

푹푹 나에게 오는 봄을 잃었네

나도 봄인 적 있어서

매일 밤 가위 눌렸네

나 가는 길 군데군데 서 있던

꽃 같은 여인

왜 그토록 오래오래

봄을 무서워했을까

 

 


 

 

최문자 시인 / 벽과의 동침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최문자 시인 / 꽃냉이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모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을 말려왔는지.

내 안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말려왔는지.

전에는 겹 백일홍이었을지도 모를

겹 동백이었을지도 모를

꽃잎과 꽃잎 사이

모래와 모래 사이

나와 그 사이

그 촘촘했던 사이.

보아라. 지금은 손이 쑥쑥 들어간다.

헐거워진 자국이다

떠나간 맘들의 자국

피마른 혈관의 자국.

 

신두리 모래벌판 가본 사람은 알지

피마른 자국마다 꽃 피는 거

헐거워진 모래자국으로도 노랗게 꽃 피우는 거

지금, 신두리 모래벌판 꽃냉이 한철이다

슬픔도 꽃처럼 한 철을 맞는다.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음. 박두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신석초문학상, 한국서정시문학상 등을 수상. 협성대 문창과 교수, 同 대학 총장, 배재대 석좌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