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시인 / 무서운 봄
무섭게 봄이 오고 있네 봄밤은 숨차고 자꾸 간지러운 지느러미가 새로 생기네 내 마음 너무 많은 기둥을 세웠네 단추 풀고 홑치마 훌렁 들추고 출렁출렁 달려드는 봄을 마구 비틀거리며 쫓아버렸네 그토록 굵은 기둥을 세우고 푹푹 나에게 오는 봄을 잃었네 나도 봄인 적 있어서 매일 밤 가위 눌렸네 나 가는 길 군데군데 서 있던 꽃 같은 여인 왜 그토록 오래오래 봄을 무서워했을까
최문자 시인 / 벽과의 동침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최문자 시인 / 꽃냉이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모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을 말려왔는지. 내 안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말려왔는지. 전에는 겹 백일홍이었을지도 모를 겹 동백이었을지도 모를 꽃잎과 꽃잎 사이 모래와 모래 사이 나와 그 사이 그 촘촘했던 사이. 보아라. 지금은 손이 쑥쑥 들어간다. 헐거워진 자국이다 떠나간 맘들의 자국 피마른 혈관의 자국.
신두리 모래벌판 가본 사람은 알지 피마른 자국마다 꽃 피는 거 헐거워진 모래자국으로도 노랗게 꽃 피우는 거 지금, 신두리 모래벌판 꽃냉이 한철이다 슬픔도 꽃처럼 한 철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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