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영자 시인 / 잡초를 뽑으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허영자 시인 / 잡초를 뽑으며

 

 

잡초를 뽑노라면

하느님은 높으신 하늘보다

낮고 낮은 땅 아래

더 오래 머무시는 것 같애

사람이 씨 뿌리지 않고

물 주어 가꾸지 않아도

무성히 우거지는

뽑아도 뽑아도 돋아나는 잡초

땅 아래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신비

창조의 신화

잡초는 하느님이 지으시는 농사

교황께서 몸을 굽혀

낮은 땅에 입 맞추시는 까닭을

너무 잘 알 것 같애

잡초를 뽑노라면

 

 


 

 

허영자 시인 / 길

 

​​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다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다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허영자 시인 / 투명에 대하여 1

-숨어있는 투명

 

 

때로는

풀잎에 맺히는 새벽이슬

 

때로는

잎새에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외로이

몇 억 광년을 날아온 저 별빛

 

초록에서 진초록, 진초록에서 유록

그 사이의 시간

 

히말라야 상상봉의

만년설에 숨어있는 메아리

 

검은색이 결단코

물들이지 못하는 순수

 

비손이하는 마음의

간절하고 정직한 슬픔

 

 


 

허영자(許英子) 시인

193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숙명여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 인하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학위. 1962년 박목월 추천 현대문학 등단.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 현재는 명예교수.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투명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위하여』, 『마리아 막달라』, 『꽃 피는 날』, 『친전』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그 어둠과 빛의 사랑』 등,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민족문학상(1998), 숙명문학상(2003) 수상. 한국시인협회장(2002),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