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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발자국과 깊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오규원 시인 /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공이 눈부시다

 

 


 

 

오규원 시인 / 나무속의 자동차

ㅡ 봄에서 겨울까지2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공급하는

나무

나무속의

작고 작은

식수 공급차들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뿌리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속의

그 작고 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 할까

 

 


 

 

오규원 시인 / 유리창과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오규원(吳圭原) 시인(1941~2007)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 오규옥(吳圭沃),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