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시인 /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공이 눈부시다
오규원 시인 / 나무속의 자동차 ㅡ 봄에서 겨울까지2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공급하는 나무 나무속의 작고 작은 식수 공급차들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뿌리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속의 그 작고 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 할까
오규원 시인 / 유리창과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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