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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향숙 시인 / 낭만 감옥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성향숙 시인 / 낭만 감옥

 

 

투명한 추위가 적립된 둥근 나라

눈 덮인 십자가가 아득한

흰 눈밭은 언제나 빨강초록의 낡은 수첩을 열어놓지

코 빨간 순록의 썰매가 전송한 은박 시간들은

따뜻한 낭만에 도착했을까?

 

겨울을 집어 들자 흰 눈이 쏟아진다

나는 비현실에 곤두박질친 채

차가운 낭만을 견딘다

 

콧등과 눈꺼풀에 휘몰아치는 겨울을 들고

목도리도 두르지 못한 추억들의 소환

존재하지 않는 계절의 눈발은 비듬처럼 건조하다

 

눈보라의 진부한 발라드는 시작도 끝도 없다

온기를 견디는 희디흰 폭풍

어깨위엔 사계절 내내 눈보라가 흩날린다

 

눈송이들의 세포가 한 잔 커피에 녹는다

이번 생은 난분분 눈보라

 

아슬아슬 걸린 교각 건너

따뜻한 전구 불빛이 새는 창문

몇 개 성냥개비 온기마저 자주 꺼뜨리는

이곳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가끔 무료함을 들어 흔들면 낭만이 쏟아진다

 

반년간 『상상인』2023년 1월 상반기호(통권 제5호) 발표

 

 


 

 

성향숙 시인 / 젖은 불꽃

 

 

몸에 시너를 붓고 성냥 그었을 때

여자는 꽃이 되었다

냉정이거나 지독한 나태이거나 정열이거나

꽃은 꽃이다

쏟아지는 관심으로

한 번에 발화되는 수많은 눈빛들

놀라운 초현실적 꽃의 진원지는

텅 빈 햇살, 눈부신 바닥, 꽉 찬 어둠

뒤통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상상하도록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미, 살갗에 다닥다닥

붉은 꽃들, 외상 혹은 내상

꽃물 터져 흐르는 곳 푸른 잎 한 장 덧대본다

 

-시집 『엄마, 엄마들』 푸른 사상/ 2013년

 

 


 

 

성향숙 시인 / 궁금, 궁금

 

 

도로 끝 파란 성채 안에선

정원에서 맞는 일요일 오전과

그들끼리 우스꽝스런 사랑과 밀실에서 나누는 이야기

어둠과 환상이 이끌고 가는

무너지지 않을 담장 안의 움직임에 대해

 

늘어선 벽돌담이거나 좁은 울타리 안이거나

이 길은 우리들 상상의 공간이야

골목의 가로등 밑도 우리 영역이야

 

너의 상상은 적극적이다

궁금이 굴러가는 곳으로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과

집 나간 고양이를 짝지우고

무궁한 자동기술법의 체위가 난무한다

 

거침없이 선정적인 환멸들

변덕스런 애무의 혓바닥 같아

차마 목구멍에 걸려 발설하지 못하는 어휘들

 

최고 명령권자인 여왕의 일곱시간

아우성의 들끓는 시간과 같았는데

모두 궁금했던 일곱 시간은 어디로 잦아들었을까?

흘러간 골든 타임은 침묵처럼 가라앉아

여왕과 함께 침몰 중이고

 

 


 

 

성향숙 시인 /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안녕하십니까?

 

잠깐만,

들판을 지나 구름을 따라가다 접질려 발목이 삐었다

빛나는 햇살이 이마에 부딪쳤기 때문이야

대지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야

 

소복하게 부푼 멍과 푸른 발등과

시린 발목을 가만히 직시하는데 우두커니

말뚝에 묶인 줄 끝에 붙어

염소 한 마리 깔깔깔 노래 한 소절 부른다

말뚝을 몇 바퀴 빙빙 돌면서

 

충분해

달달한 감동은 아니지만

뒤집힌 바퀴처럼 가끔 헛발질의 리듬을 음미하는 것

우울을 전달하는 절름발이 걸음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아침의 눈인사와 지난밤의 잠자리, 손에 쥔 휴대폰

길바닥에 숨은 크고 작은 안녕들

원초적 감정과 본능들

 

일이 꼬이면 뒤돌아 몇 발짝 절뚝이며 걸어보는

어쩐지 슬픈 뒷모습

 

들판의 염소가 감긴 줄을 풀다가 말뚝에 머리 찧고

질식한 흰 침을 흘리고 서 있어

고요하고 절망적인 평화, 역겨워

 

염소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성향숙 시인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8년《시와 반시》에 〈그랜드파더 클락 세븐맨〉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엄마, 엄마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