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시인 / 이태원골목에서 -10.29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며 1 젊은 일기장을 채우던 바람이여 이타적 미래로 나아가던 바람이여 포장마차 소주잔의 심지를 돋우던 바람이여 자기소개서를 응원하던 바람이여 세상의 안부를 챙기던 바람이여 어머니의 자장가로 밤을 재우던 바람이여 행진곡처럼 부르던 바람이여 골목 끝까지 설레던 바람이여 2 아아,한순간 사라졌구나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 바람이여 예약처럼 선물처럼 개선군처럼 돌아와 영원히 이 골목을 채워라
맹문재 시인 / 수선공의 손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우리 마을 구둣방 수선공은 길과 구석에 쌓인 쓰레기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구두를 받자마자 오랜 병마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이내 이리저리 뒤집으며 실을 뽑고 찬찬히 가위질을 해댔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듯 망치로 톡톡 두들기고 볼을 감싸기도 했다 나의 구두는 어느새 수선공의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끄무레한 세밑 하늘이 어둡지 않았고 라디오를 타는 외환 위기 뉴스가 불안하지 않았고 수없이 다가오는 겨울바람도 시리지 않았다 잘 가라는 듯 수선공은 한번 더 구두를 매만지고 내게 건넸다 감쪽같이 변신한 의치(義齒)와 다르게 기운 자국을 당당히 가진 구두 수선공의 손은 어느새 구둣방의 문틈으로 먼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창비, 2005)
맹문재 시인 / 짚가리
던지는 짚단을 받아 아버지는 쌓는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가 짚단을 던지고 할아버지가 저렇게 쌓았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올해 내가 짚단을 던지고 아버지가 받아 쌓는다 허물어지지 않게 어미 까치가 둥지를 짓듯 이리저리 맞추고 밟는 아버지를 보며 내아들을 생각한다 당신이 가시는 날엔 나도 아들이 던지는 짚단을 저렇게 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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