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태수 시인 / 세잔에서-역동적 균형
영원은 순간순간에 대등하여 현재는 낱낱이 살아 있는 영원. 모래알 하나 그대로일 수 없는 것도 삼라만상이 공명 속에 있기 때문. 주황빛 바위들의 광채. 목욕하는 나신들에 어린 하늘빛. 그 어떤 현상에도 영원은 총동원되어 있다. 쌓이고 쌓이는 빛이 순간을 태풍 눈보라가 역동적 균형을 벗어날 수 없는 법. 그의 터치에 걸려들면 햇살도 층층이 얼어붙어 영원은 지금 서늘히 메아리친다. 그 울림에 매료되었나, 마지막 길에는 이젤이 곁에 있었다.
시집 『빛들의 수다』에서
설태수 시인 / 얼굴
얼굴 능가하는 굴이 있을까. 40년을 바라본 사이인데 그의 굴은 오리무중일 때가 대부분. 눈빛으로 소통되곤 했으나 얼이 비치는 굴 발견한 적이 있긴 했던가? 어쩌다 고인 눈물에서 굴 안쪽이 설핏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감 잡기 어려웠다. 지상 너머로 허공 지나 공허에 얼굴의 뿌리는 내리고 있는지도. 〈카드 하는 사람들〉*의 무표정이든 건너편 젊은 남녀의 웃는 얼굴이든 그들 깊이가 잘 안 보이는 것이 외려 약이다. 그가 햇볕에 자주 몸을 맡기는 걸 보면 얼굴 깊은 안쪽도 이제는 볕을 쬐고 싶은 모양. 버거웠던 그 오랜 깊이를 몸은 서서히 내려놓고 싶은 모양.
*카드 하는 사람들: 폴 세잔
-한국시인협회 엮음 『너의 얼굴』,《청색종이》에서
설태수 시인 / 설악행 5
단풍 드는 설악을 걷다가 제트기와 잎이 물드는 것 중 어느 쪽이 빠를까? 하였더니 친구는, 무슨 소리냐? 한다.
제트기 나는 것은 보이지만 물드는 속도는 보이질 않으니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른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웃었다.
뜨거운 열기, 굉음도 없이 주저 없이, 떠벌림도 없이 밀약도 없는 천자만홍의 속도는 낮과 밤, 비바람도 가리지 않는다. 암벽이나 바위틈 어디건 불문이다.
제자리에 있어도 천하를 하나로 꿰고 있다. 가슴에 직방으로 와 닿는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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