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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연 시인 / 엄마를 베꼈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3.

김도연 시인 / 엄마를 베꼈다

 

 

-언젠간 알게 될 것이여

씻지도 않은 씀바귀 뿌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엄니는 알듯 모를 듯 혀를 찼다

그때마다 내 목구멍에도 씀바귀가 뿌리를 내렸지만

파란 대문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씀바귀의 쓴 맛을 알지 못했다

 

그 후

밤마다 꿈속까지 뻗어 내려온 씀바귀 뿌리가

나를 파란 대문으로 인도했지만

세월의 속살은 아직 부드러웠고

파란 대문은 이미

닿을 수 없는 고향집이 되어 있었다

 

별을 따고 싶었지만

도시의 별은 너무 높이 떠 있었다

파랑새는 차츰 말을 잃어 갔으며

눈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내 슬픈 눈망울에 별을 그려 준다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세월은 저희들끼리만 행복했다

남자의 언약은 언제나 공수표였다

 

별을 보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했다

별보다 더 높은 하늘에 파란 대문이 걸려 있었다

세월이 알게 해 준다던 엄니는 그 세월에 막혀

끝내 파란 대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도깨비 바늘만 무더기로 피어

함부로 고향집을 넘보고 있었다

 

 


 

 

김도연 시인 / 나의 별서

 

 

 기다리면 오는 것이지만 그녀는 오고야 말았다

 목련꽃 하얗게 침입한 오늘 아침 이 순간에도

 창가에 부딪히는 그 모든 풍광이 지겹지 않다

 봄날은 가는 것이고

 또 내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한순간 애틋한 문을 열었다가 닫을 것이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또 옷깃 여며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슬픔은

 서럽다거나 애틋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별서이므로

 후회의 밤은 그래서

 길다

 

 논산역 귀퉁이 작은 플랫폼 뒤꼍에 엄마는 피어났고 봄꽃처럼 그렇게 떠나보냈었다. 그때 웃으며 붉은 눈시울 꾹꾹 참아가며 등 돌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 집 뜰에 다시 제비꽃이 피었다. 살아낸다는 것은 이 문과 저 문 사이를 부지런히 통과해서 무심히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자. 엄마를 만나고 엄마를 보내며 사는 일이 슬픔을 비껴서며 외로움을 견디는 나의 별서 아니었던가.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논리로 엄마답게 봄을 건넜고, 나는 참으로 무덤덤하게 엄마를 만나고 보내는 중이라고 애써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도연 시인 / 전언

 

 

 아가, 오늘이 니 귀 빠진 날인디 미역국은 챙겨 묵었냐, 나가 엄동설한에 느그 오빠랑 니를 낳아 이리 꼴딱꼴딱 아픈가 보다. 날갯죽지가 있음 훨훨 날아가 고깃점 쑹쑹 썰어 넣고 미역국맛나게 끓여주고 올낀데 이젠 눈도 어둡고, 쩌기 날아댕기는 새만 보면 부러워 죽겄당께, 아가, 남들은 살도 통통하게 찌고 이쁘게 화장도 하고 다니더구만 무슨 샛바람에 공부를 한다고 밤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머리털 다 빠지게시리 삐쩍 곯아서 다니누. 죽도 못 얻어 먹은 사람처럼, 시 나부랭이는 호랭이나 처먹으라고 줘버리고 맛난 것도 사먹고 새처럼 훨훨 날아 댕기거라 잉, 시절 금방 간다야, 금방 늙어 빠져서 아무도 안 쳐다본땅께, 지금이 얼마나 이쁠 나인디, 똥개도 복슬복슬한 이쁜 놈만 따라다니지 털 숭숭 빠져버린 개새끼는 쳐다보지도 안 한당께, 똥개는 뭐 눈꾸멍이 없깐? 이제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께 좋은 놈 만나 연애도 하고 그놈이 속 썩이걸랑 이 에미한테 델꼬와라 잉! 나가 다리몽댕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께, 나가 니 가졌을 때 하늘에서 내려 오는 조롱박을 치마 가득 따는 꿈을 꿔서 너는 어느 놈을 만나도 잘 살끼다, 나가 죽어서도 니 생일날 미역국 먹나 안 먹나 눈 요래 치켜 뜨고 지켜볼란다. 아따 근디 저놈의 똥개는 왜 저리 지랄 염병을 떨어쌌는지 모르것다. 밥 달라는갑다, 아가, 이만 전화 끊어야 쓰겄다. 에미 말 명심허고,

 

 


 

 

김도연 시인 / 고추벌레

 

 

말라가는

고추 속을 들여다보니

붉은 고추보다

더 바싹/ 말라가고 있는 고추벌레

 

염천 속에 들어

고추씨만 파먹고 있다

 

 


 

김도연 시인

196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12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엄마를 베꼈다』(시인동네, 2017)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