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 /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을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시집 『달 넘세』, 창비, 1985
신경림 시인 / 바람의 풍경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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