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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영옥 시인 / 연꽃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2.

배영옥 시인 / 연꽃

 

 

천 년 동안 중천을 떠돌던 엄마가

속이 텅 빈 골다공증 엄마가

백랍(白蠟) 같은 엄마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던 엄마가

연꽃 속에서

소복단장을 벗고 있다

 

 


 

 

배영옥 시인 / 자두나무의 사색

 

 

갈망(渴望)에 대해 생각하느니

갈(渴)과 망(望)에 따르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하여

순수하고도 티끌 하나 없는,

번져오고 번져가는

이 목마른 잎사귀에 대하여

무성한 손아귀로 숨통을 조여오는 칡넝쿨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자두나무는 생각한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는 저 촉수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칡넝쿨에 온몸 내어준 채

자두나무의 사색이 붉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는 누구의 갈증인가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더 위험한 짐승이 되는

갈망

다시 생각하느니

마른 잎사귀에도 그늘은 지고

그늘은 결코 마르지 않느니

칡넝쿨의 결박이 견고해질수록

불타오르는 나의 갈망, 갈증 아니 너에 대하여

 

 


 

 

배영옥 시인 /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찌그러진 주전자를 옆에 두고 한 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다

반나절이 다 익어가도록 흐느끼고 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낮게 스쳐간다

발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다가

젖은 눈물자국이 말라가는 한낮의 아이

 

오랫동안 내 속에서 죽은 아이

지금도 포도나무를 보면 되살아나서

자전거 바퀴를 한 발로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포도만 알알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배영옥 시인 / 안개빛 그리움이여

 

 

희미한 그림자 속으로 간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파아란 불빛을 찾아

그대와나 길을 간다

 

뭉개구름이 둥둥 간다

그 하늘빛 아래

 

그대와나 둘이 거닐어 본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가을 빛으로 머물어 본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배영옥 시인(1966~2018)

1966년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뭇별이 총총』(실천문학, 2011)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있음. '천몽' 동인으로 활동. 2018년 6월11일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