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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2.

신경림 시인 /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을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시집 『달 넘세』, 창비, 1985

 

 


 

 

신경림 시인 / 바람의 풍경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 〈갈대〉 〈석상〉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