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평범한 나의 신
홀로 있어 더 붉은 장미를 본 후 긴 겨울 강을 건너간다
강의 저편에서부터 따끔거리는 불빛이 밀려왔다 밀려간 후 유리창 밖 안개 가득한 저녁 대기 속에 서 있는 자작나무의 자세에 내 옷을 벗어주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허락된 배반의 결국이 될지라도 다시 누군가를 기다려야만 하는 자세
수식어를 하나씩 버리고 있는 겨울나무 사이로 간혹 부딪치는 작은 짐승의 웅크린 어깨와 움직이지 않는 눈빛 집이 없어 집이 없어 나는 지금 집이 없어 그리고 강철 같은 겨울 밖으로 조용히 삐져나온 사과 반쪽과 레몬차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은 잠시 여기 이렇게 머물러야 하는 우리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평범한 나의 신은 버스를 타고 떠났다 밥은 먹고 가야지 순간 버스를 잡을 뻔했지만 덜컹덜컹11월이 잠실대교를 지나가고 있다
커다란 백빽을 매고 야콥센의 베르가모의 페스트와 땅콩과 히트텍과 머플러가 들어 있는 케리어를 끌며 강을 건너오고 있는 나의 환영 속으로 또 젖은 강이 먼저 다가온다
다시는 버스정류장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 길을 세 번 더 가게 되었을 때 모략의 입김과 금빛 모래로 지은 도시는 조금 더 야위어 있어도 괜찮았다
-2022년 계간 딩아돌하 겨울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민주주의여
아무런 말이 없는 민주주의여
이 환한 봄날 붉은 꽃처럼 떨어지는 형제를 안고 있는 우리를 어쩌라는 것이냐
이 환한 봄날 차갑게 식은 형제를 끌어안고 묘지로 걸어가는 우리를 어쩌라는 것이냐
이 환한 봄날 형제의 가슴에 총구를 조준하는 내 조국을 어쩌라는 것이냐
사랑하는 내 형제를 내 조국을 어쩌라는 것이냐!
이재연 시인 / 분명한 저녁
흔하게 말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잠시 알던 여자는 잣나무 아래 잠들고 비가 내리고 비가 그쳤습니다
아래층 아니면 위층에서 섬유유연제 냄새 훅 올라왔습니다
실내화 끄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투정이 유리창 밖으로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모두 저녁 식탁에 모여 있습니다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 가슴에 들어와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때마침 두어 마리 새는 젖은 하늘에 수를 놓습니다
누군가 아이를 부릅니다 애타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따라 건물 밖으로 사라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흐린 대기 속에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봤습니다 이목구비가 늙은 나무였습니다
늦은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약속을 버리고 나는 어쩐지 차가운 것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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